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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전(Charles Hadden Spurgeo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1.13|조회수70 목록 댓글 0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전(Charles Hadden Spurgeon)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찰스 스펄전(Charles Hadden Spurgeon: 1834-1892)은 영국 에섹스의 캘버던 (Kelvedon, Essex)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회중교회의 목사였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에섹스에서 54년을 섬겼고 아버지 역시 영국 여러 곳에서 목사로 섬겼다. 이때의 회중교회는 국교회제도를 비성경적으로 보고 개 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면서 신학은 칼빈주의를 추구하였다. 찰스는 침례교 목사가 되었지만 신학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산을 간직하였다. 찰스의 가문은 프랑스에서 도피한 위그노의 후예였다.

구속하시는 사랑: 내 삶의 주제

그는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하여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야했다. 그는 초, 중등학교를 나와서 몇 달 동안 농업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1849년에는 침례교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사들을 돕는 보조로 일을 했다. 그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탁월한 지성을 소유하였고 공부하는 것과 책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6세 때 이미 『천로역정』을 읽고 거기에 빠져들어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청소년 시절에는 청교도 서적을 탐독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서재에는 1만 2천권이상의 책이 있었고 매주 6권씩 책을 읽었다고 한다.

찰스는 1850년 첫 주일에 교회에 가는데, 눈보라 때문에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가까이에 있는 한 감리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설교자는 좀 미숙해 보였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그의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후에 스펄전은 그날의 이야기를 즐겨하곤 하였다. 그날 교회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설교자는 아마도 평신도 설교자인 것 같았다. 설교 본문은 이사야 45장 22절이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Look unto me, and be ye saved, all the ends of the earth.)

설교자는 단어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했는데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찰스는 그 본문에 자신을 위한 희망의 불빛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설교자는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다. “이것은 정말 간단한 본문입니다. 본문은 ‘보라’고 합니다. 단순히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대학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바보라 해도 볼 수는 있습니다....” 10여분의 시간이 지나가 설교자는 좌석에 앉아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설교자는 찰스를 보고 말했다. “젊은이 당신은 매우 비참해 보입니다.” 찰스는 강대상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충격이었고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설교자는 계속하였다. “만약 이 본문에 순종하지 않으면 당신은 항상 비참할 것입니다. 살아서도 비참하고 죽어서도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당신이 순종한다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보시오! 보시오! 보시오! 당신은 보는 것 이외에 다른 할 일은 없습니다.”

그 때 찰스는 구원의 길을 바라보았다. 보라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가. 그가 바라볼 때 어둠의 구름이 걷히고 태양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고귀한 보혈의 피를 찬송하고 그를 바라보는 단순한 신앙을 노래하였다. 이전에 그는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제야 모든 것이 지혜롭게 질서 잡히고 ‘구속하시는 사랑’이 그의 삶의 주제가 되었다.

감리교 예배에서 회심한 그는 세례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세례는 믿는 자를 위한 것을 가르친다고 확신하였다. 그의 부모들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찰스에게 자신의 확신을 따르도록 격려하였다. 찰스는 세례를 받았고 캠브리지의 한 침례교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찰스 스펄전은 곧 자신이 설교의 은사를 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평신도 설교자 협회에 가입하였다. 당시 침례교회에는 설교자가 되는데 특별한 규정이 없었다. 스펄전은 1852년에 캠브리지에 가까운 워터비치(Waterbeach)에 있는 작은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 지역은 조야한 곳으로 술주정꾼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 청중은 아름다운 신학적 강해를 원하지 않았고 그는 직설적인 형식의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단순하게 전했다.

곧 워터비치의 청년 설교자의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하였고, 1854년 런던에서 이름 있는 뉴파크스트리트 교회(New Park Street Church)가 그를 목사로 초청하였다. 그 교회는 18세기의 신학자 존 길(John Gill)과 19세기 전환기에 지도적 위치에 있던 존 리폰(John Rippon)이 시무하던 교회였다. 이제 겨우 20세인 그가 이 초청에 응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었다. 그 교회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졌었지만 당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일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화려한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으나 100여명이 모이고 있을 뿐이었다.


설교자들의 왕자

그 당시 런던의 교인들은 시적인 문구로 가득 찬 정교한 문장들로 이루어지는 설교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스펄전은 매우 간결하고 직설적인 설교를 하였기에 그의 설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청교도적인 신학을 친숙한 용어로 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강하지만 선율적인 목소리는 그의 극적인 제스처로 보완되었다. 복음적인 그의 설교는 많은 회심자들을 더 하게 하였다. 예배 참석자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옛 건물로는 몰려오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4,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홀을 빌려야했다. 이런 빠른 성장은 런던 신문들의 주목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다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신문은 그의 설교는 품위가 없다고 하고 거룩한 종교의 신비가 그에 의해서 경건치 못하게 다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교회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였고 사용하고 있는 홀마저 적어서 교회는 1만 2천명의 좌석을 가진 서리 음악관(Surrey Music Hall)을 빌렸다. 그러나 이 큰 음악관을 채우고도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 이곳에 모인 첫 예배 때 불행하게도 큰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선동자들이 ‘불이야’라고 소리를 쳐서 당황한 사람들이 밀려서 7명이 죽고 28명이 크게 다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스펄전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다.

1860년대에 영국에 새로운 복음운동이 일어나고 스펄전은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1861년에 뉴파크스트리트 교회는 6,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건물인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The Metropolitan Tabernacle)을 지었다. 겨우 26세인 스펄전의 봉사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였다. 그는 그 교회에서 38년을 봉사하였다. 한 자료에 의하면 그가 그 교회에 도착한 1854년에는 교인수가 232명이었는데 1891년에는 5,311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사이에 14,460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보통 설교의 주제를 결정하는 일을 많이 미루는 스타일이었다. 즉 주일 오전의 설교 주제는 토요일 저녁에 정하였고, 주일 저녁의 설교 주제는 그날 오후에 정하였다. 충분한 메모가 한 장의 종이에 채워지고 많은 예화들은 설교를 전달하는 동안에 즉흥적으로 전해진다. 매 월요일에 설교는 출판을 위해서 개정되었다. 그는 60권 이상의 설교집을 비롯하여 주석, 경건서적 등 평생 140권의 책을 펴냈다. 출간된 설교는 1,900편이 넘는다.

나아가 그는 목회자 대학(Pastor’s College)을 세워 목회자 900명을 훈련했다. 500명의 고아를 돌볼 수 있는 스톡웰 집도 세웠다. 성경보급협회 회장이 되었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설교를 했다. 스펄전은 매주 열 번까지 설교를 했다. 그는 교훈적이면서도 복음적이고, 극적이면서도 직접적이고 설득력 있게 말씀을 선포했다.

그는 감리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었고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지만 신학적으로는 조부와 아버지의 뿌리를 따라 근본적으로 칼빈주의자였다. 유아세례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택의 교리를 믿었다. 그러나 선택은 우리에게 가려진 사실이므로 설교자는 모든 사람을 선택받은 자로 여기고 설교에 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인간의 책임을 모두 받아들였다. 성경이 이 모두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자들의 왕자’(Prince of Preachers)로 불렸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저서와 설교가 널리 읽혀지고 있다.

스펄전은 잘 웃는 사람이었지만 우울증으로 시달렸다.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 중년 이후에 그의 체중이 늘었고 류머티즘(rheumatism)과 통풍(gout)으로 힘들어했다. 그는 가끔 이렇게 이야기했다. “바이스(vice, 공작물을 끼워 고정하는 기구)에 손을 넣고 다른 사람에게 힘껏 누르게 하면 많이 아프겠죠? 이것이 류머티즘입니다. 거기에 더 힘을 가하면 그것이 통풍(gout)의 아픔입니다.”


그는 휴양을 위해서 1891년 가을에 남부 프랑스에서 쉬면서 신약주석 작업을 하였고 건강에 차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한 고통을 느낀 그는 다음날인 1892년 1월 31일 휴양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2월 8일 월요일 저녁에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 교회에 도착하였다.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10만 명의 조문객이 조의를 표했고, 2월 11일에 장례가 엄수되었다. 큰 인파가 거리로 나와 그의 운구차량을 따르면서 장례행렬이 3km에 달하였다. 가게는 문을 닫았고 집집마다 조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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