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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대학생선교회(C.C.C.)의 창시자 빌 브라이트(William R. "Bill" Bright)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1.19|조회수50 목록 댓글 0

대학생선교회(C.C.C.)의 창시자 빌 브라이트(William R. "Bill" Bright)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빌 브라이트(William/Bill Bright: 1921-2003)는 오클라호마주의 코웨타(Cowet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었으며 목장을 일구고 시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는 이 아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빌에게 신앙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몸소 모범을 보이고 자녀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뒤에도 성경을 읽거나 오랫동안 기도하였다. 빌은 어린 시절에 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쉬임없이 기도하였다.

빌은 학업에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운동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식축구 팀이었던 그는 시합 중에 고막을 다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대신 클럽활동과 연극과 연설에 열중하였다. 빌은 한 마디로 리더십을 지닌 다재다능한 학생이었다. 빌은 노스이스턴주립대학교(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에 다니면서도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최우수졸업생 상도 받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목장주가 되고 싶었고, 변호사가 되고 신문사 사주가 되어 후에 의회에 진출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빌은 194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날 일이 있어서 로스엔젤레스로 갔다. 그날 저녁에 그는 한 젊은이를 차에 태워주었다. 그 청년은 빌에게 그날 저녁에 어디서 묵을지를 물었고 빌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그 청년은 자신이 사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청했다. 그 집은 네비게이토선교회의 창설자인 도슨 트로트만(Dawson Trotman)만의 집으로 네비케이토선교회 회원들이 모여서 살고 있었다. 빌은 그 집에서 저녁을 먹고 지적이며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내는 청년들을 만났다. 빌은 그 밤에 트로트만과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빌은 자신이 받은 환대와 대화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빌은 다음 날 아침 그 집을 나왔고 다른 일들로 그 만남은 잊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어머니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빌은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자신의 사업(Bright’s California Confections)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고급 식료품을 고급상점이나 백화점에 공급하는 일이었다. 그는 얼마 후에 괜찮은 수입을 갖게 되었다. 그는 시간을 내어 드라마를 배웠고, 일요일 아침에는 아마추어 무선을 하였고 오후에는 말을 타고 헐리우드 언덕에 올라가곤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빌의 집 주인이 그를 거듭 교회에 초대하면서 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빌은 헐리우드제일장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는데, 그 교회에는 기독교교육의 책임을 맡은 헨리에타 미어스 박사(Dr. Henrietta Mears)가 이끄는 대학생과 청년들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미어스 박사의 활력 넘치는 성품과 하나님 사랑은 빌에게 큰 영향과 도전을 주었다. 많은 청년들이 지적이었으며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으나 물질적이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빌은 그 자신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미어스 박사의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복을 찾기’에 대한 도전이 있는 강의가 있었다. 모임이 끝난 후 빌은 ‘내적인 행복’을 열망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후에 그는 이렇게 회고 하였다.

“그날 밤 나는 침상 곁에서 미어스 박사가 우리에게 도전한 질문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구원을 위한 기도였다. 나는 신학적으로 깊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시고 내 안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해석해 주셨다. 이제 나는 미어스 박사와 나눈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내가 그를 내 삶에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초대한다면 그는 나에게 들어오심을 믿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빌은 청년부의 회장이 되었다. 빌은 파사디나(Pasadena)에 있는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 등록하였다. 1948년에 그는 미어즈 박사가 지도해 온 보네트(Vonette)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빌은 사업, 신앙생활, 신학교 공부 등으로 분산된 삶을 살았다.

복음화의 짐을 지고 산 사람

1951년 어느 날 깊은 밤에 빌이 시험 준비를 위해서 공부를 하는 중에 강력한 비전이 나타났다. 그것은 캠퍼스 복음화를 통해서 대위임(great commission)을 성취하라는 것이었다. 큰 비전에 영향을 받은 그는 다음 날 아침에 그의 교수이며 멘토인 윌버 스미스 박사(Dr. Wilbur Smith)와 이 비전을 나누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다음날 스미스는 빌에게 말했다. “내가 믿기로는 하나님께서 너의 비전을 위한 이름을 주셨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캠퍼스 운동’(Campus Crusade for Christ: C. C. C.)이다.

많은 기도 후 빌 브라이트 부부는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전도자로 훈련시키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신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빌은 자기 회사를 팔고 UCLA(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캠퍼스 가까운 곳에 집을 세 들었다. 빌과 동료들은 남학생들에게, 보네트는 여학생들에게 다가가는데 주력하였다. 몇 달 후에 학생회 회장, 학교 신문사 편집인, 그리고 몇몇의 우수한 운동선수들을 포함하여 250명의 학생이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하였다. 이 운동은 빠르게 다른 대학에서 퍼져나갔으며, 1953년 8월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1952년에 그는 ‘4영리’(The Four Spiritual Laws)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전도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빌 브라이트의 꿈과 사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초교파 선교단체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세계선교의 가장 본질적인 표시로 만들어진 것이 영화 ‘예수’(Jesus)였다. 1979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재정적으로는 손해를 보았으나 영적인 결실을 얻었다. 이 영화는 40억 명이 관람하였으며 이를 통해 1억 2천백만 명이 회심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빌 브라이트는 1996년에 템플턴상(Templeton Prize)을 수상하였다. 그는 다섯 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대한민국 전북대학교에서 받은 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몇 명 되지 않는 마음의 짐을 지고 산 사람이었다. 그것은 세계 복음화의 짐이었다. 그의 진정성과 온전함, 그리고 주님께 대한 헌신은 나의 사역의 초기로부터 큰 영감과 축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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