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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20세기 성경 번역 선교의 선구자 윌리엄 캐머런 타운센드(William Cameron Townsend)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1.19|조회수45 목록 댓글 0

20세기 성경 번역 선교의 선구자 윌리엄 캐머런 타운센드(William Cameron Townsend)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윌리엄 캐머런 타운센드(William Cameron Townsend: 1896-1982)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사람들은 그를 캠(Cam)이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에 그는 사촌들과 함께 물놀이를 하던 중 물에 빠져 거의 익사 직전까지 간 경험을 하였는데 이것은 캠으로 하여금 다소 이른 나이에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을 고민하게 하였다.

청각 장애자였던 아버지는 캠을 헛간의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서 그의 믿음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캠은 그의 대답을 종이에 썼고 아버지는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개인적인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가장 어두운 곳이 가장 복음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옥시덴탈 대학(Occidental College)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생자원봉사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에 합류하였고 모트(John R. Mott)의 메시지는 그가 외국 선교에 참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7년에 그는 ‘LA 성경하우스’(Bible House of LA)가 진행하는 성경 세일즈맨 프로그램에 신청하여 칵치켈(Cakchiquel) 인디언에게 스페인 성경을 팔기 위해 과테말라(Guatemala)로 보내졌다.1) 그런데 칵치켈 원주민은 스페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스페인어 성경을 파는 것이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한 인디언이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의 하나님이 그렇게 멋있는 분이라면, 왜 우리가 쓰는 말을 배우지 않느냐?”(If your God is so smart, why hasn’t he learned our language?) 당신네 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 왜 우리말도 모르느냐는 것이었다. 이 말은 그가 그들의 언어로 마가복음을 번역하기로 결심할 때까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엘비라(Elvira Malmstrom: -1944)와 1919년에 결혼 한 후 ‘중앙아메리카 선교회’(Central American Mission: CAM)에 참여하였고 칵치켈 원주민을 위해서 사역하게 되었다. 그는 언어학습에 착수하였고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마가복음 번역이 끝나자 그는 신약성경의 나머지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1929년에 이 일이 완성되자 칵치켈 원주민들은 외쳤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말을 하신다.”(Now God speaks our language!) 그는 그가 번역한 성경을 과테말라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한 저명한 멕시코의 교육자가 타운센드를 찾아왔고 그가 한 일에 대해서 감명을 받았다. 얼마 후에 멕시코로 돌아간 그 사람은 타운센드에게 멕시코로 와 달라는 연락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는 폐결핵이 생겼고, 그의 부인에게도 치명적인 심장병이 왔다. 그들은 몸의 회복을 위해서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그들의 병이 회복되자 친구 선교사인 레그터스(L. L. Legters)는 그에게 멕시코로 갈 것을 종용하였다. 멕시코에는 50개의 원주민이 아직 그들의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때 멕시코에서는 사회주의 대통령이 당선되어 모든 종교 재산을 몰수하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 나라를 떠나도록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레그터스는 뉴저지로 가서 미국 캐직(Keswick) 수련회에 참석하고 멕시코와 멕시코의 원주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타운센드의 비전을 위해 기도하는 날을 가졌다. 미국 캐직의 대표였던 에디슨 로스(Addison Raws)는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을 요청하였고 레그터스와 그의 아내는 온 밤을 강당에서 기도로 지냈다. 캐직 수련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확신하며 타운센드와 레그터스로 하여금 곧 멕시코로 가서 성경번역 사업의 허락을 요구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영국에서의 캐직 수련회에서도 멕시코 원주민을 위해서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운센드는 아내를 처가로 보내고 레그터스와 함께 멕시코 국경까지 갔다. 국경에서 멕시코 입국이 거절 되었을 때, 타운센드는 멕시코의 교육자가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고 그들의 입국은 허락되었다.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그는 멕시코의 지방교육(rural education) 대표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타운센드에게 멕시코의 지방교육을 6주 동안 연구할 기회를 주었고 그가 쓴 분석 보고서에 흡족해 하였다. 타운센드와 레그터스는 멕시코가 그들에게 길을 열어줄 것을 확신하고 아칸사 주에서 성경번역을 위한 3개월 과정의 번역학교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최초의 영어성경 번역자 위클리프의 이름을 따서 ‘위클리프 캠프’(Camp Wycliffe / Summer Institution of Linguistics: SIL)라고 명명하였다. 3명의 학생과 4명의 교수진이 헛간에 있는 못통(nail keg)에 앉아서 공부를 하였다. 그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으며 딱딱한 나무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캠프를 진행하였다.

타운센드 일행은 1935년에 멕시코로 갔고 그들 종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 WBT)는 점점 더 커져서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적인 개신교 선교단체로 성장하였다. 이 선교회는 현재 3,000여명의 선교사를 회원으로 가지고 있으며 650개의 언어를 연구하고 그 언어를 사용하여 글을 썼다. 그는 또한 밀림비행 및 라디오사역(Jungle Aviation and Radio Service: JARS)을 시작하였다. 그의 아내 엘비라는 1944년에 죽었고 2년 후에 얼라인(Elaine Mielke: 1915-2007)과 재혼 하였다.

중앙아메리카의 정글을 이동하면서 번역 선교회의 캠프를 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에 타운세드 부부와 그들의 작은 아기 그레이스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로 그는 영구적으로 다리에 금속 플레이트를 삽입해야했고 그의 아내는 한쪽 다리를 절게 되는 장애를 갖게 된다. 그가 1982년 급성 백혈병으로 죽기까지 약 50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 작업이 진행되었다. 현재 이 지구상에는 5,000개의 종족 중에서 절반이 그들의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타운센드에 의해서 시작된 이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위대한 선교사이며 언어학자였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50년 전에 중미의 큰 부족 칵치켈 인디언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기로 결정했을 때 친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게 좀 굴지마. 그 인디언들의 기괴한 언어를 배워서 그들을 위해 성경을 번역하겠다니 말도 안돼. 그들은 그만한 수고를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이들이야. 어쨌든 그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르잖아. 차라리 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지 그래.’ 그로부터 14년 후 번역된 말씀이 칵치켈 부족 사람들에게 가져온 변화를 직접 보게 된 나는 다른 부족을 위해서도 성경을 번역해야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때 역시 친구들은 똑같은 이유로 나를 만류했다. 아마존 강 유역의 작은 원시 부족 집단들까지 번역 계획에 포함했을 때 친구들은 다른 이유를 내세우며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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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칵치켈 족은 과테말라 중서부 고지대에 사는 마야 인디언 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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