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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캐나다 장로교 최초의 중국선교사 조나단 고포스(Jonathan Goforth)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1.25|조회수43 목록 댓글 0

캐나다 장로교 최초의 중국선교사 조나단 고포스(Jonathan Goforth)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이 말씀은 조나단 고포스(Jonathan Goforth: 1859-1936)의 삶의 좌우명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이 말씀을 예증해 준다.

조나단은 캐나다의 런던(London, Ontario) 가까운 농촌에서 열한 자녀 중의 한 명으로 태어났다. 조나단의 아버지 프란시스 고포스는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캐나다로 건너온 이민자로 매우 근면성실한 농부였다. 이민을 온 당시 그는 십대의 청소년이었으나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농장을 두 개나 소유하게 되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느라 바쁜 고포스씨에게 종교는 별로 안중에 없었다. 식사기도를 하거나 자녀들과 함께 취침기도를 드린 적도 없었다.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심이 아니었다면 조나단은 아예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로 성장했을 것이다.

일곱 살 경에 그는 처음으로 학교에 갔는데 그 때 그는 형들 어깨 너머로 글자를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 학교에 갔을 때 다른 아이들이 글을 읽지 못해서 답답했고 학교생활이 실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간 첫날부터 그를 사로잡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칠판 옆에 붙어 있는 세계 지도 한 장이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조나단은 그 앞에 서서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먼저 자기가 사는 온타리오주의 런던을 찾아보고, 그 다음에는 약간 뒤로 물러서서 전 세계를 바라보며 도대체 지도에 나오는 저런 장소들은 어떤 곳일지를 상상해 보았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머나먼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조나단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린 조나단은 그런 외국 땅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꼭 열심히 공부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 결심대로 그는 언제나 학교에서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본격적인 영적 순례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려는 18세에 시작되었다. 라클란 캐머론(Lachlan Cameron)이라는 목사가 성경공부를 위해서 자주 학교를 방문하였다. 조나단은 그 목사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 캐머론 목사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가 세 번째 교회를 갔을 때, 목사의 설교가 자기를 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교의 끝 무렵에 조나단은 개인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리스도께 복종하였다.

얼마 후 그가 15마일 떨어진 그의 형 윌(Will)의 농장을 방문했는데, 윌의 장인은 그에게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의 회고록』(The Memoirs of Robert Murray M’Cheyne)이라는 책을 주었다. 그는 마차를 타고 오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사이며 전도자의 이야기였다. 그는 책을 읽는 것에 몰두하여 말을 묶어놓고 해가 질때까지 책을 읽었다. 맥체인의 복음에 대한 부담감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조나단은 그의 삶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구세주께로 이끌어 가는데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조나단은 한 극동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의 비통을 표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자기가 시작한 사역을 계속해 나갈 젊은이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나단은 주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가고, 누구를 보낼까?” 그는 대답하였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 그 시간은 바로 조나단의 선교사역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낙스 칼리지(Knox College)에 다니는 동안 그는 도시의 슬럼가를 자주 방문하였다. 그는 토론토에서 로잘린드 벨 스미스(Rosalind Bell-Smith)를 알게 되었다. 로잘린드는 로즈(Rose)로 알려진 회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우선 로즈의 허름한 의복이 눈에 들어왔으나 그녀의 눈에서 드러나는 목적의식에 마음을 빼앗겼다. 며칠 후에 그는 로즈의 낡은 성경과 성경 속에 가득 기록된 메모들을 볼 수 있었다. 로즈는 이 남자야말로 자기가 결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결심하였다. 조나단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들은 1884년 10월에 결혼하였고 넉 달 후에 중국으로 향하였다.

나의 생명 보다 중요한 것

중국에서 그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역의 어려움도 커서 그들의 열한 명의 아이 중에서 다섯이 죽었다. 그의 사역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정도가 걸렸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께 입에서 중국어가 봇물 터지듯이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강대상 앞에서 설교를 하는 조나단의 입에서 그동안 배운 중국어가 마치 국수 가락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얼마나 적절한 단어들을 나열하여 말을 하고 있는지 조나단도 스스로 탄복할 정도였다. 중국에 온 이래 그렇게 유창하게 중국어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중국인들도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역력했다. 도중에 도날드가 일어나 말을 하려고 하자, 모인 사람들이 조나단이 계속 설교를 해 달라고 입을 모아 요청할 정도였다.”

조나단 고포스는 한국으로 가서 1907년 대부흥운동의 결과들을 직접 보기도 하였다. 그는 몇 명의 한국인을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에서의 부흥을 이끌어갔다. 그의 책 『나의 영으로』(By My Spirit)는 중국에서의 부흥을 잘 설명하고 중국 선교의 동기를 상기시켜 준다. 70세가 가까워 오면서 조나단 고포스는 만주(Manchuria)에서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였고 짧은 기간에 수천 명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70명이 넘는 복음사역자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시력을 잃은 후에도 사역을 계속하였다.

1934년에 캐나다로 돌아온 그는 여러 곳에서 연사로 부름을 받았다. 비록 그는 70대 중반이고 소경이었지만 18개월 동안 481회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토론토에서의 그의 마지막 주일에 그는 네 번이나 설교를 하였다.

1936년 10월 7일, 그는 40마일 떨어진 곳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로즈가 일찍 잠에서 깨어 조나단이 아직 잠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이미 더 아름다운 곳으로 떠난 후였다. 몇 주 전에 그는 그가 죽은 후 처음으로 보게 될 분은 자기의 구주시라고 말하였는데, 이제 그는 그 분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된 것이다. 그의 장례는 토론토의 낙스 장로교회에서 진행되었다. 그곳은 그들 부부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며, 처음 중국으로 파송을 받은 교회이며, 그들의 선교사역을 위해 지속적으로 후원하던 교회였다.

“마을 사람들은 수많은 서양인들이 의화단 사건으로 죽음을 당했는데도 여전히 서양인들이 자신의 마을에 들어온 것을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나요?’ 사람들은 조나단에게 종종 그렇게 물었다. ‘뭐가 그리 중요해서 생명을 걸고 우리에게 온 것입니까?’ 조나단은 그 때 마다 자신을 중국으로 다시 오게 만들 정도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설명했다. ‘나의 생명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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