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신앙의 인물들

원숭이 재판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1.29|조회수42 목록 댓글 0

원숭이 재판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진화론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1859년에 『자연선택의 수단에 의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을 저술함으로써 분열을 초래하는 주제가 되었다. 처음에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이 성경에 기록된 창조와 모순이 되는 지에 대해서 생각이 나뉘었다.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창조의 행위에서 진화를 제한적으로 사용하실 수도 있다고 믿었다. 다른 이들은 진화론은 성경의 창조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근본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공격적으로 진화론을 비판하였다. 진화론을 비판하는 선두에 선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이었다.

브라이언은 일리노이주의 세일럼(Salem, Illinois)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경을 읽는 부모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일리노이 대학을 1881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1883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일리노이와 네브라스카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891년에 그는 네브라스카의 1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895년까지 일하였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는 잡지의 편집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곧 그는 정치인으로 국가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1896년 이후 세 번이나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1912년에 윌슨(Woodrow Wilson)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는 국무장관에 지명 되었고 1913년 3월 5일부터 1915년 6월 9일까지 재임하였다.

브라이언은 국무장관을 마친 후에는 기독교운동의 지도자로 헌신하였다. 그는 성경 클래스를 인도하고 종교서적을 저술하였으며 라디오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주위에서 붕괴되고 있는 윤리적 기준을 보면서 그 주된 원인이 인간의 기원에 대한 다윈의 견해 때문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1921년에 브라이언은 진화론에 대한 공격을 적극적으로 시작하였다. 그의 유명한 강의인 ‘다윈주의의 위협’(The Menace of Darwinism)에서 그는 진화론의 물질주의적 철학에는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으며 결과적으로 윤리적 삶에 대한 자극을 빼앗아갔다고 주장하였다.

브라이언의 노력으로 진화론에 대한 반대가 1920년대에는 국가적인 움직임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남부의 여러 주에서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그 중에서 테네시주가 통과시킨 법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테네시 주는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창조의 이야기를 거부하는 어떤 이론을 가르치는 것과 그 대신에 사람이 동물의 낮은 질서로부터 유래된 것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테네시의 주지사가 법안에 서명을 하자 미국인권옹호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은 이 법을 시험해 보겠다고 공언하였다. 연맹은 이 문제로 인해서 피소되는 교사들을 도울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테네시의 데이튼(Dayton)에 사는 저명한 몇몇 사람들은 젊은 과학 교사인 존 스코프스(John Thomas Scopes: 1901-1970)를 설득하여 법을 어기고 기소되도록 설득하였다. 곧 스코프스는 자신이 학교에서 진화를 가르쳐왔음을 고백하였으며 기소되었다. 인권옹호연맹은 그를 위해서 아주 화려한 변호인단을 제공하였다. 이 변호인단을 이끄는 사람은 대로우(Clarence Darrow)였는데 그는 종교적 회의론자이며 그 당시 국가적으로 유명한 변호사였다. 검찰 측은 브라이언에게 그들의 변호를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원숭이 재판으로 알려진 스코프스 재판(1925년 7월 10–21일)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큰 홍보거리의 하나가 되었고 많은 취재진들이 작은 마을 데이튼에 모여들었다. 거기에는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라디오 방송국도 동원되었다. 취재진들은 테네시의 기독교인들을 뒷걸음질 치는 촌뜨기들이라고 묘사하면서 즐거워하였다. 재판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재판 장소를 법원 밖 잔디밭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William J. Bryan(왼쪽에 앉아있음) & Clarence Darrow(오른쪽에 서있음)

브라이언은 열정적으로 검찰측을 변호하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스코프스의 변호인단은 브라이언을 증인으로 채택함으로써 재판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대로우가 퍼붓는 반대심문의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 브라이언은 어려움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언론은 그를 조롱하였다. 나이 들고 피곤한 그의 증언은 사실 보다는 열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다음 날 판사는 방어 측 증인으로서의 그의 증언들을 속기록에서 삭제하였다.

1925년 7월 21일 배심원들은 스코프스를 몇 분 만에 유죄로 평결하였다. 스코프스에게는 100불의 벌금형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후에 테네시 최고 법정은 절차상의 문제에 의해 그에 대한 유죄판결을 기각하였다. 이 재판에서 화젯거리가 된 것은 유명한 한 변호사가 국가적으로 이름 난 연설자에게 굴욕감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브라이언은 재판이 끝난 후에도 며칠 동안 여러 곳에서 연설을 하였다. 재판이 끝난지 5일째 되는 1925년 7월 26일 주일날 그는 뇌일혈(apoplexy)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워싱턴으로 옮겨져 알링턴 국립묘지에 장사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정치가, 그러나 진리의 친구! 영혼에 진실하고, 행동에서 믿을 만하며, 명예에서 깨끗한 사람.”(Statesman, yet Friend to Truth! Of Soul Sincere, in Action Faithful, and in Honor Clear.)

그리고 다른 한 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그는 믿음을 지켰다.”(He Kept the Faith.)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