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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3.10|조회수44 목록 댓글 0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A.D. 400년 전후하여 서방교회에 암브로시우스가 있었다면 동방교회에는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Chrysostomos)로 ‘황금의 입’(golden-mouthed)을 의미하며 후에 그의 별명이 되었다. 그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군대의 장교였다. 그러나 존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 안수사(Anthusa)는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20대의 여성이었는데 그가 낳은 남매를 양육하기 위해 여러 번 청혼을 거절했다. 어머니는 훌륭한 스승을 택하여 아들 존을 교육하였다. 존은 안드라가티우스(Andragathius)로부터는 철학을, 리바니우스(Libanius)로부터는 고전과 수사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독교에 깊이 헌신하게 되고 타르수스의 디오도르(Diodore of Tarsus)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사실 존은 금욕생활에 끌리고 있었다. 존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c. 375) 안디옥 근교의 산에 있는 동굴에서 2년간 살면서 글을 쓰고 성경을 연구하였다. 엄격한 은둔생활에 위와 신장이 많이 상했지만 그의 영혼은 크게 성숙하였다.

그는 안디옥에 돌아와 381년에 멜레티우스(Meletius)에 의해 부제(deacon)로 임직을 받았고 5년 후에는 플라비엔(Flavian) 주교에 의해 사제로 임직되었다. 그는 안디옥에서 유능한 설교자로 등장하였는데 풍유적(알레고리적) 해석을 선호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는 달리 안디옥 학파의 문자적, 문법적 해석을 이용하여 설교를 하였다. 그는 12년간 (386-397) 안디옥의 황금교회(Golden Church)에서 성경 여러 권을 연이어 설교하였다. 그는 안디옥에서 인기를 얻게 되고 그의 명성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387년에 세금부과 문제로 안디옥에서 소요가 일어나 시민들이 황제와 그의 가족의 동상을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 질서는 곧 회복되었으나 처형이 시작되었고, 시민들은 황제의 보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과 공포의 사순절 기간에 존은 20편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존은 시민들을 위로하고 동시에 잘못을 보도록 권고하였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설교에 귀를 기울였고,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으며 많은 이교도들이 설교로 인해서 개종하였다. 그로 인해 도시는 심각한 결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존의 설교의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

397년에 동방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자리가 비게 되었다. 황제 아르카디우스(Arcadius)는 존을 감독으로 선택하였다. 존은 안디옥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납치당하듯 옮겨오게 되었다. 그는 시민들의 동요를 걱정하여 비밀리에 안디옥을 떠났다. 존은 39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오필루스(Theophilus)의 집례로 감독에 취임했다. 존은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안디옥에서처럼 능력 있는 설교로 많은 청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상대하기 어려운 두 적이 있었는데, 한 명은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루스였고 다른 한 명은 황후 유독시아(Eudoxia)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오필루스는 콘스탄티노플 감독의 기세를 꺽고 그가 자기에게 순종해 주기를 원했다. 그는 존을 시기한 것이었다. 그도 존처럼 오리겐의 풍유적인 성경해석에 반대하긴 했지만 존이 지나치게 편파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존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주변 사제들의 부도덕한 모습을 보고 정죄하며 강력한 설교를 했다. 그래서 느슨한 생활을 하는 사제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 강한 적은 황후 유독시아였다. 존은 직선적인 사람으로 고위층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사치스런 여성들이 지나치게 화려한 의복을 입는 것을 나무라며 정죄하였고 황후는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했다.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 건립에 교회재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오리겐 신학을 추종하는 4명을 징계했는데 존은 콘스탄티노플에 그들을 받아들였다.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존의 대적들과 함께 황실의 소유인 오우크(the Oak)라는 곳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존을 정죄하고 면직하였다. 황후 유독시아는 상당히 미신에 사로잡힌 여자였다. 공의회가 존을 정죄한 후 얼마 안 되어 황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황후는 그것을 지진으로 착각하였다고 한다. 이에 놀란 황후는 존이 수도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를 다시 불러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존이 얻은 평화는 잠시였다. 그 후 황후가 자신의 은 동상을 만들어 교회당 가까이에 세우게 되었을 때 존은 이 제막식을 담대하게 정죄했다. 황후는 이 일로 존을 어느 때 보다도 더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황실의 군대가 부활절 예배에 침입하여 예배를 중단시키고 존의 지지자 몇 사람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존은 아르메니아의 타우루스 산맥(the Taurus mountains in Armenia)의 커커서스(Cucusus)라 불리는 황량한 땅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서방의 교황 인노센트 1세(Innocent I)가 항의하였으나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유배를 당한 가운데서도 존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회 일에 대해서 자문하였다. 407년에 동방 황제는 그를 더 먼 곳인 피티우스(Pytius)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그곳은 흑해(Black Sea)의 북동쪽 해변에 있는 곳이었다. 가는 도중에 그는 잔인한 취급을 받고 뜨거운 여름에 폰투스의 코마나(Comana in Pontus)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438년에 그의 유물은 코마나에서 거두어져서 콘스탄티노플의 사도들의 교회( Church of the Apostles)에 다시 묻혀졌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와 유독시아 황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는 존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저가 부모의 잘못에 대해 자비를 구하였다.

존은 ‘황금의 입’을 가진 목사로 놀라운 설교의 유산을 남겼다. 성경을 문자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안디옥의 방법을 한층 발전 시켰다. 그의 설교는 총 600편 정도가 남아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67개 설교), 시편(59), 마태복음(90), 요한복음(88), 사도행전(55), 로마서(32), 고린도전후서(74), 그리고 다른 성경이나 주제에 관한 짧은 시리즈 등이다.

그의 설교는 삶과 연관된 것으로 궁핍한 자에 대한 돌봄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자선이 없는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는 동성애 문제를 설교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사치와 부유한 자에 대한 비판, 성직자들의 개혁을 강조하였다. 그의 설교의 목표는 두 가지였는데,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적용하여 청중들의 행동이 변화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에 매료된 청중의 박수 소리에 설교가 자주 중단되기도 하였다. 존은 두 시간씩 설교할 때가 많았는데 사람들은 더 오래, 더 자주 설교를 해 주기를 바랐다.

그가 남긴 바울서신에 대한 설교는 루터와 칼빈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그는 밀란의 암부로시우스처럼 세상의 통치자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씀을 외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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