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신앙의 인물들

복음을 위한 아사(餓死), 앨런 가드너(Allen Francis Gardiner)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04|조회수49 목록 댓글 0

복음을 위한 아사(餓死), 앨런 가드너(Allen Francis Gardiner)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앨런 가드너(Allen Francis Gardiner: 1794-1851)는 영국의 쿰브 로지(Coombe Lodge, Oxfordshire)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가드너의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가드너에게 이유를 묻자 가드너는 자기는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인데 그것을 위해서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바다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에 붙잡힌 가드너는 1808년 6월 왕립해군대학(Royal Naval College, Portsmouth)에 입학하였으고, 1810년부터는 해군으로 복무를 시작하였다. 해군의 생활은 그를 어머니의 경건한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으나 그는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하며 그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영국의 한 기항지에 머물고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어떤 갈망이 되살아났다. 리마(Lima)에 머무를 때 그는 중세의 종교재판소 자리를 방문하고 잔인한 고문의 도구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였다.

타이티(Tahiti)에 머물 때 그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그곳에 와서 짧은 기간만 머무르고 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받고 있었다. 가드너는 그곳에 있는 교회에 참석하였고 본토인들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일기를 보면 남아프리카로 향하면서 그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보게 된다.

“지난번 내가 이 식민지를 방문하였을 때 나는 넓은 길을 걸었고 영원한 파멸의 경지로 큰 발걸음을 걷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찬양한다. 그는 나를 사랑하셨고 그 자신을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지금 나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

1823년 그는 쥴리아 수잔나(Julia Susanna)와 결혼하였으나 1834년 5월에 그의 아내가 죽자 가드너의 생각은 그가 해군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게 되었다. 가드너는 그 사람들이 자기가 만난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리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해에 그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의 줄루족 안에서 선교본부를 세웠다. 그는 줄루의 왕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사건과 원주민 전쟁 등으로 선교 사업은 성공할 수 없었다.

가드너는 1836년 10월에 엘리자베스 리디아(Elizabeth Lydia)와 재혼하였으며, 용기를 잃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 오래 간직해왔던 남아메리카로 향해 나갔다. 그는 식구들과 함께 15년 이상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대상으로 선교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파타고니아 선교회(Patagonian Missionary Society)를 설립하였다.

그는 포클랜드 제도(Falkland Islands)로부터 그의 활동을 위해 필요한 식량과 물품을 공급해 줄 지원조직(supply system)을 마련하고 1850년 12월 5일에 다른 여섯 명과 함께 티에라 델 프에고 섬(island of Tierra del Fuego 혹은 The land of the Fire)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전도하기 위해 내지로 움직이고자 하였다. 날씨는 좋지 않았고 땅은 척박하였다. 더욱이 적대적인 인디언들이 그들을 밀어내고 그들의 작은 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이 가진 식량은 6개월 분량뿐이었고 새로운 양식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들은 포크랜드에서 지원물이 오기를 기다리며 가능한 한 아껴서 먹으며 오래 동안 연명하려고 하였다.

1852년 1월에 공급선이 도착하였으나 여러 달을 늦게 온 것이었다. 보급물들은 포클랜드에서 선박이 부족하여 전달이 지체 되었던 것이었다. 가드너와 그의 동료들은 서서히 굶어 죽었다. 공급선이 도착하여 한 일은 죽은 사람들을 묻고 가드너가 써놓은 일기장을 가지고 오는 일이었다. 가드너는 51년 9월 6일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가난하고 약한 우리들이지만 이 배는 우리 영혼의 베델(Bethel: 선원을 위한 예배당)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여기 계심을 느끼고 알기 때문이다. 잠들 때나 깨어있을 때나 나는 – 표현의 능력을 넘어서서 – 행복하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은 나에게 위대하시고도 놀랍다. 비록 닷새 동안 먹을 것이 없이 지냈지만, 나는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다.”

가드너의 죽음의 이야기는 영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가드너가 세운 파타고니아 선교회는 남아메리카 선교회(South American Missionary Society)로 바뀌었다. 6년 후에 8명의 선교사가 적도를 지나 항해하였다. 그들은 한 해변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에 그 중 일곱 명이 인디언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았다. 오늘날 남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는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것은 모두 가드너의 신실한 섬김의 결과이며 그가 소망한 꿈이 실현된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