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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실낙원의 음유시인 존 밀톤(John Milto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06|조회수51 목록 댓글 0

실낙원의 음유시인 존 밀톤(John Milton)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고대 그리스의 눈먼 음유시인 호머(Homer)가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라는 불멸의 고전을 남겼다면,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영국의 청교도로 호머와 같은 대서사시의 형태로 신학을 써내려갔다. 그는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밀턴은 런던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밀턴 시니어(John Milton Sr.: 1560-1647)는 작곡가였으며 부유한 공증인이었다. 그 덕분에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고전어를 가르칠 수 개인교사를 고용할 정도로 넉넉한 생활을 하였다. 존은 성 바울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으며 거기서 그는 기독교사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존은 성장하면서 그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독립적 성격에 더 잘 어울리는 보다 폭넓고 학문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났다. 어린 시절부터 시력에 문제가 있었으나 밀턴은 책벌레였다. 훗날 그의 형은 밀턴이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고 훨씬 더 나이가 든 사람이 쓸법한 시를 쓰곤 했다고 회상하였다.

존은 캠브리지대학교의 크라이스트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교수와 논쟁을 벌이다가 정학을 받기도하였다. 그의 학우들도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수해야 할 학업의 양과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학창시절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가 너무나 고독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캠브리지에서 재학하고 있을 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리스도가 나신 날의 아침’을 썼다.

그는 캠브리지를 우등 졸업한 다음 몇 년간 고대와 근대의 신학, 철학, 역사, 정치학, 문학, 과학을 혼자서 공부했다. 아버지는 그가 런던 근교의 해머스미스(Hammersmith)에 있는 집에 머물며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가 그곳에 약 3년을 보낸 후 밀턴 가족은 버크셔의 호르톤(Horton, Berkshire)에 있는 버킨 맨오르 농장(Berkyn Manor Farm)으로 이사했고 존은 이사 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1632-1638). 이 기간 동안 존은 시 쓰는 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으려고 생각했다.


집에 머물며 연구에 정진하던 존은 약 15개월이 걸리는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이 여행경비도 아버지가 마련해 주었다. 그는 유럽을 여행하는 중에 서사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귀족 자녀들을 위한 사설학원을 개설하였다. 밀턴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과 찰스 1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과 공화제를 지지하는 정치문서를 쓰며 크롬웰에게 자신의 재능을 바쳤다. 그는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심지어 폭군을 제거하고 처벌할 권리까지도 국민에게 있다고 믿었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후 밀턴은 크롬웰의 공화정에 외국어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외국어 비서관은 다른 국가의 관리들과 라틴어로 서신을 주고받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력은 점점 약해졌고 결국 1652년에는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크롬웰의 공화제가 실패로 끝나고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밀턴의 인생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밀턴은 체포당하지 않기 위해서 은신했지만 결국 발각되어 옥에 갇혔고 왕권에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그것도 새로운 왕이 유명한 작품을 많이 써낸 늙고 눈먼 시인을 살려두어 백성들의 비위를 맞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최악의 처벌은 면할 수 있었다.


밀턴은 천국에서 사탄이 반역한 것과 같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던 내용에 대해서 호머와 같은 형식으로 서사시를 쓰고 싶었다. 그의 나이 50이 된 1658년에 그는 서사시를 쓰기 시작했고 5년 후에 이것을 완성하였다. 1667년에 마침내 『실낙원』을 출간하고 1674년에는 12권으로 된 개정판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4년 후에는 『복락원』을 발표했다.


이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은 눈이 안 보여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밀턴을 대신하여 그가 말하는 내용을 누군가가 받아 적었다는 것이다. 그는 밤에 머릿속에 구절들을 지어놓은 후에 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외워둔 내용을 받아 적게 하였다.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이 작품은 우주와 지구와 인간의 창조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죄와 죽음과 악의 시작을 그리고, 지옥과 하나님 나라와 에덴동산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들을 상상하고 폭정과 자유와 정의와 같은 정치적인 생각들에 대해 논하고, 예정과 자유의지와 구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변호하였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큰 호응을 얻었다.

밀턴의 명성은 그가 7세 때 세상을 떠난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10년이 넘는 작업 끝에 태어난 대작들을 통해 그는 영국 최고의 시인이 되었다. 그는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쓴 톨킨(R. R. Tolkien)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호머가 시력을 읽고 탁월한 상상력과 문학적 능력이 발현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어쩌면 밀턴도 그런 이유로 위대한 작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밀턴은 1674년 11월 8일 사망했고 런던에 있는 성 자일즈 교회(St. Giles-without-Cripplegate)에 묻혔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만일 제가 무엇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저의 조국을 명예롭게 만들고 지식을 충만케 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모든 근면과 기예를 다 발휘하여 나의 모국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혹시 라틴어로 글을 쓰면 해외에서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런 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영국 땅을 나의 세계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실명한 후, <실락원>을 구술(口述)하는 밀턴의 모습. 딸이 받아적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밀턴은 세 딸과의 관계가 모두 좋지 않았다. 아내와도 사이가 나뻐져 앞을 못 보게 된 뒤에 지인이 찾아와 사모님이 아름답다고 칭송하자 밀턴은 비아냥거리며
"장미처럼 아름답긴 하지. 아내가 말을 할 때마다 장미 가시처럼 날 쿡쿡 찌르니까."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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