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신앙의 인물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07|조회수45 목록 댓글 0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는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에서 침례교 목사(Clarence Chambers)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0대일 때 그는 아버지와 함께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인 스펄전의 설교를 들으러 간 일이 있었다. 후에 오스왈드는 아버지에게 만약 자기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바로 대답했다. “얘야, 너는 지금 바로 할 수 있어.” 그는 아버지와 함께 런던의 거리에서 조용하게 그의 삶을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시켰다. 오스왈드는 어린 시절부터 깊은 영성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음악과 미술 방면에서도 재능을 드러냈다.

1893년에서 1895년까지 그는 국립예술학교(National Art Training School: 현재 Royal College of Art)에서 공부하였고 그 후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그는 1897년에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서 더넌 복음훈련대학(Dunoon Gospel Training College)에 입학하였고 이후 8년 동안 학교에서 교사로 가르쳤다. 그 때 그의 신앙은 크게 성장하였고 복음전도를 위한 더 큰 열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오순절 기도연합’(Pentecostal League of Prayer)을 위한 순회 성경교사로 섬겼고 미국과 일본에서 잠시 사역하기도 하였다.

1911년에 그는 런던의 클랩햄 커먼(Clapham Common)에 성경대학(Bible Training College)을 설립하고 첫 번째 교장이 되었다. 이 대학의 건물은 ‘오순절 기도연합’이 구입한 것으로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는 원하는 모든 학생들을 연령, 학력, 계층을 불문하고 받아들였다. 설립 후 1915년까지 106명의 기숙학생(resident student)이 재학하였고 40명의 선교사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일어나 대학은 1915년에 문을 닫았다. 그는 1913년 5월에 거투르드 홉스(Gertrude Hobbs / 애칭 Biddy)와 결혼하였고 캐슬린(Kathleen)이라는 딸을 갖게 되었다.

Oswald Chambers & Biddy

1차 대전이 발발한지 1년 후에 체임버스는 YMCA의 목사로 승인되었고 이집트로 파송되었다. 거기서 그는 차이툰(Zeitoun)과 이스마일리아(Ismailia)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 군인들을 위한 사역을 하였다. YMCA는 72x40 피트의 ‘오두막’(huts)을 지었는데 그곳은 군인들이 와서 쉴 수 있는 장소로 원래 사회봉사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체임버스는 그 건물을 영적인 용도로 바꾸고자 하였다. 그는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음악회와 영화상영을 중지하였다.

그는 차이툰에 도착하자마자 모임을 안내하는 글을 게시했다. '읽고 쓰고 공부하기 위한 YMCA의 연구 오두막을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개방합니다. 칠판을 사용하는 강의는 매일 저녁 7시 30분에 모입니다.' 처음에 그곳 직원들은 군인들이 모임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체임버스에게는 남다른 개인적인 매력이 있었으며 연설의 재능이 있었고 특별히 남성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었다. 주중에는 매일 밤 400명의 군인들이 모여들어 그가 하는 성경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수백 명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가르침을 기다리는 많은 구원받은 영혼들이 있고, 그들은 열정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결단하는 것은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들은 그것을 손쉽게 행한다.”

1916년에 YMCA는 전도자 체임버스와 함께 모든 이집트의 군대 주둔지를 대상으로 하는 복음전도대회를 계획하였다. 체임버스는 이스마일리아 캠프에서의 모임에 관해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나는 노래를 하거나 머리를 숙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단순히 그들의 동료들 앞에 나올 것을 말했다. 그들은 진지하게 앞으로 나왔다.”

1917년 10월 17일, 그는 수요일 저녁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와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심한 복통이 계속되었으나 그는 자기 때문에 부상당한 군인의 병상이 하나 줄어든다는 생각에 병원에 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29일에 하는 수 없이 기제 적십자병원(Gizeh Red Cross hospital)으로 이송되었다. 의사는 바로 맹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시행하였고 체임버스는 곧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1월 4일 체임버스에게는 피가 굳는 혈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11월 15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내 비디는 영국에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오스왈드는 그 분의 임재 안에 있다.” 그는 시신은 카이로에 묻혔다.

체임버스는 죽기 전에 한 권의 책을 썼다. 그는 죽기 전에 이 책의 교정을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더 나은 싸움을 위한 좌절: 욥기’(Baffled to Fight Better: Job and the Problem of Suffering)이다. 이 책의 제목은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구에 나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욥의 고난 문제를 다룬다. 체임버스는 계속 일기를 써왔다.

체임버스의 아내는 훈련받은 속기사로 분당 250단어를 속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대학과 군대 캠프에서 전한 체임버스의 수백 개의 메시지를 일일이 속기로 기록하여 놓았다. 체임버스의 사후에 비디는 그의 자료들을 365일 읽기 형식으로 편집하기 시작했으며 1927년에 완성하였다. 그 책의 제목은 ‘높으신 분을 위한 나의 최선’(My Utmost for His Highest: ‘주님은 나의 최고봉’으로 번역됨)이라고 붙였다. 오늘날 이 책은 매년 팔리는 기독교서적으로 항상 10위 안에 드는 책이 되었고 40개 정도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비디는 체임버스가 남긴 자료로 12권의 책을 더 만들었으며 그의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