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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워터게이트에서 교도소 선교까지 챨스 (척) 콜슨 (Charles ‘Chuck’ Colso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10|조회수45 목록 댓글 0

워터게이트에서 교도소 선교까지 챨스 (척) 콜슨 (Charles ‘Chuck’ Colson)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챨스 콜슨(Charles Wendell ‘Chuck’ Colson: 1931-2012)은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미국은 대공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시기에 아버지(Wendell Ball Colson: 1899-1974)는 식품을 생산하는 기업에서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콜슨의 가족은 배고픔을 경험하지 않았다. 콜슨은 아버지를 자신의 최고의 친구이자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찰스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근면의 중요성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르쳐주셨다고 말한다.

그는 해군 복무를 마치고 브라운 대학교(Brown University)와 조지 워싱턴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 법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워싱턴, D.C.에 있는 유명한 법률회사의 간부사원으로 일하였다. 1969년에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의 생의 방향을 바꾼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전화였다. 그는 닉슨 대통령의 특별자문역(special counsel)을 맡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이 일로 인해 워터게이트 사건(the Watrgate scandal)에 연루되었고 그 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법률회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1973년 3월에 그는 백악관에 들어오기 전에 자신의 고객이었으며 레이시온 회사(Raytheon Company)의 회장인 탐 필립스(Tom Phillips)를 방문하였다. 콜슨은 부사장으로부터 필립스 회장이 종교적인 경험으로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필립스 회장이 종교적인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였다. 콜슨에게 필립스는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이고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내 생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내 생애의 가장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콜슨은 어리둥절하여 다소 편한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후에 필립스 회장은 그를 문까지 따라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척, 언제가 나는 당신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군요. 나는 내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에 이르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모든 것은 변하였습니다.” 공허한 삶에 대한 언급은 척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그해 여름 휴가때 콜슨과 부인은 워터게이트 청문회를 피해서 보스턴 근교에 있었다. 척은 필립스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필립스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고, 루이스(C. S. Lewis)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 나오는 한 부분을 읽어 주었다. 루이스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는 ‘교만’을 ‘암’(cancer)으로 묘사한 것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필립스는 후에 척에게 그 책을 한 권 건네주었다. 그는 자신의 입술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올 때까지 그 책을 읽고 묵상하였다. “오 주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내 삶 가운데 와 주십시오. 나는 당신께 나를 드립니다.”


콜슨은 곧 작은 기도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모임에는 아이오와의 민주당 상원위원 헤롤드 휴즈(Harold Hughes)와 미네소타의 공화당 하원의원 알 퀴에(Al Quie)가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겨진 새로운 형제들의 지원을 받으며 콜슨은 워터게이트와 관련된 범죄에 대해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였다. 그것은 반전 행동가인 데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에 대해서 경멸적인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콜슨은 ‘1년에서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전의 대통령의 특별자문역을 맡았던 사람이 이제는 엘러바마에 있는 맥스웰 연방 감옥(Maxwell Federal Prison in Alabama)에서 복역하게 된 것이다. 그의 자서전에 보면 그는 감옥에서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고 봉사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죄수들의 옷 세탁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꾸준한 섬김에 모두가 감동을 받게 되었다. 콜슨은 ‘평생 동안 집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나는 저들을 사랑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척이 그 감옥에서 7개월 가까이 복역할 즈음에 그의 가족들의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그의 아내는 한계점에 도달하였고 아들은 마약소지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 때 알 퀴에 하원의원이 그에게 연락을 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어느 누군가가 나에게 말해 주었는데, 나는 대통령에게 당신의 남은 복역기간을 내가 대신할 수 있을지 물어보려고 합니다.” 알 퀴에는 기도하는 중에 콜슨의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기독교인의 마음으로 그를 대신해서 복역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변호사였던 그는 특수 법조문 안에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형기를 치룰 수 있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콜슨은 그날 밤에 완전히 하나님께 굴복하였다. 믿는 자들이 베푸는 사랑 앞에 그의 교만했던 자아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이다. 이틀이 지나서 재판관은 심리 중에 그를 가족문제로 인해서 석방시켜 주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 기독교인인 연방법원집행관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석방시켜주실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콜슨은 대답했다. “형제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틀 전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척 콜슨은 문학작품과 저술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라디오 방송에서의 해설을 통해 기독교적 세계관을 펼치는 일에 기여하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시민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그는 15개의 명예박사학위와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Templeton Price)을 1993년에 수상하였다.


콜슨은 복역 중에 권력이 사람을 굴복시킬 수 없으며, 주님의 사랑만이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976년에 ‘교도소선교회’(Prison Fellowship)를 창설하였고 그것은 후에 ‘국제교도소선교회’(Prison Fellowship International)로 확대되었다. 미국 내에서는 1,300개 교도소에서 이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7,700개의 교회와 14,0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섬기고 있다. 국제적으로 이 사역은 현재 110개국 이상에서 복역중인 사람과 이전에 복역한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콜슨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이 사역을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준비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가장 큰 역설은 수감생활을 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된 이들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누렸던 성공, 화려한 경력, 재능, 상, 명예 등을 통해 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사용하신 것은 바로 내가 감옥에 갔다 온 전과자라는 사실이다.”

한 잡지는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현재 미국의 가장 건강한 사상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저술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전도자, 그리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가장 따뜻한 이웃인 그가 새로운 이웃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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