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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피렌체의 개혁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12|조회수41 목록 댓글 0

피렌체의 개혁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이태리의 패라라(Ferrara, Italy)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우 민감하고 신중한 소년으로 기독교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으나 그의 이상주의는 그로 하여금 의학을 그만두게 하였고 세상의 악과 싸우기 위해 도미니칸 교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는 1482년에 피렌체(Firenze: 영어로 Florence)의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회로 옮겼고 거기서 원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사보나롤라는 가톨릭교회의 부패로 인하여 큰 고통을 받았고 그가 본 것은 지도자들 안에 경건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기도, 금식, 그리고 초심자 수도사를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1491년에 그는 설교자로 유명해졌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임박한 심판과 회개의 필요성이었다. 그는 또한 성직자의 속화, 지배계급의 악행, 세속적 삶의 일반적 부패에 대해 설교했다.

지배계층에 대한 그의 비판은 1494년에 사보나롤라로 하여금 피렌체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민주당의 실제적인 지도자로 만들었다. 그는 이전에 프랑스의 왕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예언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이루어졌고, 이제는 프랑스왕이 승리한 후에 도시의 점령을 포기하도록 설득시켰기 때문에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사람들은 그를 예언자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메디치가의 통치가 무너지고 그가 지도자가 되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귀족정치를 배격하고 신정정치적인 민주정부를 세우고 종교개혁을 실현하려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는 자기의 권력과 인기를 교회와 국가의 개혁을 이루는데 사용하였다. 비록 그가 훗날의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교회의 조직이나 가르침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믿음에 의한 칭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실상 독재자였다. 그리고 그의 지도력 아래서 피렌체는 놀라운 변화를 겪고 있었다. 사업가들은 잘못된 방법으로 얻은 수익을 환수 당하였으며, 사람들은 열심히 성경을 읽었고 교회는 사람들로 넘치게 되었다.

그 당시에 사보나롤라는 많은 적들을 가지게 되었는데 특별히 성직자들 안에 많았다.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미워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공개적으로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495년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는 사보나롤라로 하여금 로마로 와서 예언의 능력을 보이라고 소환하였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나쁘고 로마로 가는 도중에 폭행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명령을 거절하였다. 이에 교황은 그가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잠시 명령을 따르며 공부에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지 않는 동안에 일반적으로 혼잡함과 소동으로 가득 찬 연례적인 축제의 기간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거리에서 찬송을 부르는 시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또한 사보나롤라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 후에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통제하기 위해서 산 마르코 수도원을 로마의 권위 아래 있는 수도회의 새로운 그룹과 통합할 것을 명령하였다. 사보나롤라는 이 명령을 거역하였다.

교황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서 추기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붉은 모자? 나는 피의 모자를 원한다.” 그의 영적인 영향력은 매우 강하여 1497년의 축제 때에는 아이들이 외설적인 책들과 그림들을 모아서 광장에서 찬송하면서 그것들을 불태웠다. 이 ‘허영의 소각’(bonfire of the vanities)은 도시의 중도 층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사보나롤라에게 불리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피렌체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나쁘게 전개되었다. 사보나롤라는 대 피사 전쟁에서 실패하였고 메디치파의 모략으로 인심을 잃었으며 교황은 계속 그에게 도전하였다. 사보나롤라의 엄격한 견해에 대한 후원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그의 권력도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교황은 사보나롤라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를 눈치 채고 이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1497년에 알렉산더 6세는 교황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을 근거로 사보나롤라를 파문하였다. 교황은 피렌체시로 하여금 그를 조용하게 있게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재판을 위해 로마로 보내라고 하였다. 변덕스러운 대중은 시 정부가 바뀌면서 그를 버렸다. 새로운 정부는 사보나롤라를 1498년에 체포하였다. 그는 선동과 이단으로 재판을 받았고 심하게 고문을 받았다. 1498년 5월 23일 그는 공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몸은 화형 되었다.

그의 사후 피렌체의 시민들은 옛 생활로 돌아갔으나 참되게 변화한 사람들 역시 많았다.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였다.

사보나롤라의 교수형과 화형

시뇨리아 광장, 사보나롤라가 화형된 장소의 기념판

패라라에 있는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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