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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주일학교의 시작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15|조회수49 목록 댓글 0

주일학교의 시작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 1736-1811)는 영국 글라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애주의자였으며 주일학교운동의 창시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와 같은 이름을 가졌으며 어머니의 이름은 메리(Mary)로, 이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글라스터 저널’(Gloucester Journal)이라는 신문의 발행인 겸 인쇄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도 목사였다. 레익스는 1767년 앤(Anne)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6녀를 두었다. 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졸업한 기록은 없다. 그는 사업가가 되는 것을 선호한 것 같고 2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일을 받아서 하게 되었다.

레익스는 일찍부터 사회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로 범죄와 교정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감옥은 비위생적이며 비도덕적인 범죄의 온상이었다. 그는 감옥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얻은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25년이나 지속된 그의 노력에 실망감을 느낀 레익스는 범죄와 부도덕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하였다.

주일학교가 태동되기 시작한 1780년의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속한 도시화로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오게 되었는데, 그들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으며 어린 아이들까지도 1주일에 6일을 하루 15시간씩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리에 눈 밝은 공장 주인들이나 상인들은 국가에서 미성년자 노동에 대한 아무런 법규의 제정이 없음을 기회로 하여 이들을 노예같이 혹사하였다.” 가난한 노동자들과 어린이들은 주일이 되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난폭하게 행동하고 싸우며 쉽게 범죄에 빠져들었다. 레익스는 어린이의 격한 놀이와 싸움, 거친 언어를 들으며 소위 ‘교육적 회심’을 체험하였고, 그는 사회 범죄의 원인이 무지와 게으름에 있다고 보고 근본적인 치료방법을 교육에서 찾기 시작하였다. 교육사학자 카버리(E. Cubberley)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휴식의 날이며 또한 제분소와 공장들이 문을 닫는 날인 주일에 어린이들은 거리로 달려 나가 그 날을 부도덕과 악행으로 보냈다. 영국의 농장지대에서 농부들은 청소년 공격자들의 약탈로부터 농장과 곡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일에 특별한 예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일학교운동의 배경이 된 그 당시의 교육의 상황을 보면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영국에서는 의무교육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그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1) 교육은 가정과 교회의 일로 인식되었으며 교회가 설립한 학교는 상류계층의 자녀들만이 그 혜택을 볼 수가 있었다. 또한 빈민자녀들은 교육을 받지 않는 것이 좋다는 부정적인 생각까지 팽배해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거나 읽지를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가정교육만으로 극복하는 것은 역부족이었으므로 이 때 주일학교는 큰 호응을 얻게 된 것이었다.


레익스는 어린이들의 모임이 가능한 주일에 학교를 개설하였고, 부인교사를 고용하고 장소 사용이 허락된 가정집에서 교육을 시작하였다. 주일 아침 10-12시에 시작한 교육은 후에 오후 1-5시까지 연장되었으며, 교육내용은 주로 읽기, 쓰기, 산수 등의 일반교육적인 것이었고, 후에 찬송, 예배, 교리, 성경공부 등이 추가되었으며 생활훈련(손씻기, 세수하기, 머리빗기 등)과 관련된 내용에도 역점을 두었다.

레익스는 어린이의 잠재가능성과 예방교육에 대한 신념으로 시작하여 주일학교를 대중교육으로 발전시켰고, 성경을 근거로 한 기독교사회교육 내지는 대중교육을 전개하였다. 주일학교는 처음에는 ‘교회 밖의 운동’으로 교회가 외면한 교육을 교회 밖에서 실천하였다. 3년간 주일학교를 실험한 레익스는 이 운동이야말로 사회개선의 바람직한 대안임을 확신하면서 1783년 자신이 만드는 신문에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였는데 그 영향력이 기대 이상이어서 주일학교를 영국과 유럽대륙으로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1783년 11월 3일에 그는 그의 신문에 그간의 일에 대해서 보고하는 기사를 게재 하였다.

“도시와 시골에 사는 농부들과 다른 주민들은 주중의 다른 어느 날 보다도 주일에 더 많은 재산 손실을 당하고 있다고 불평을 한다. 이것은 주로 주일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허용된 젊은이들의 무법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이 악을 치유하기 위하여 아주 적절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읽을 줄도 모르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채용되었고, 또한 읽을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교리문답을 가르쳤으며 교회로 인도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채택되어진 교구에서는 어린이들의 행동이 크게 교화되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이 짧은 기사를 보고 사람들은 주일학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신문들이 연이어서 이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레익스의 주일학교는 영국의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학교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우선 공장주나 부유층은 어린이에게 휴식의 기회를 주지 않고 일요일 오전과 오후에 가르치는 것은 다른 날의 작업능률을 떨어뜨린다고 비난하였고, 심지어는 자기들의 선량한 일꾼들을 의식화하여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불만을 느끼게 하여 임금상승을 부채질한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찬성하였으나 쓰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반대하기도 하였다. 교회 역시 이 운동에 관용적이지 못하였다. 국교회 성직자들은 평신도가 가르치는 것에 우려를 표시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이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집단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운동이 교회를 분열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반대하거나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주일학교운동은 세상에 알려지면서 크게 호응을 받았고 또한 유럽에 퍼져 나가 스웨덴,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등으로 진출하였다. 주일학교의 발전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1780년 초기에 레익스는 90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4개의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주일학교가 신문에 알려진 이후 4년간 25만 명의 학생이 등록하였다. 1811년 그가 죽었을 때는 40만 명이 넘는 주일학생이 있었다. 레익스의 동상이 제막된 1831년에는 125만, 1835년에는 150만을 훨씬 능가하였는데, 이 학생들 중 절반 이상이 주일학교교육이 유일한 교육경험이었다. 그 당시에 자원봉사를 하던 교사의 수는 16만여 명이었으며, 그 숫자는 교사 1명 당 학생 10명이 못되는 아주 이상적인 비율이었다. 맨체스터시의 어떤 주일학교에서는 120여명의 자원교사에 2,700여명의 학생이 있었고, 그 학교의 교사 중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주일학교 출신이었다고 한다.

주일학교운동은 영국에 새로운 영적각성을 일으켰으며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교육을 실시할 것을 자극하였다. 한 평신도인 레익스에 의해 시작된 영국의 주일학교는 미국으로 건너가 교회 안에서의 신앙교육과 선교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주일학교는 다시 유럽으로 그리고 한국과 세계 여러 곳으로 전해져 성장하는 세대의 신앙교육을 위한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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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의 공교육은 산업혁명시기에 이르러 그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주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지원성격이 강하였다. 1870년의 초등교육법, 1918년의 피셔 교육법에 의해서 초등단계의 교육이 활성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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