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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어린이의 사도 스티븐 팩슨 (Stephen Paxso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16|조회수43 목록 댓글 0

어린이의 사도 스티븐 팩슨 (Stephen Paxson)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주일학교를 생각할 때 창시자인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그와 함께 빼어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 윌리엄 폭스(William Fox: 1736-1826)이다.(1)

또한 미국 주일학교의 역사를 살피면서 한 사람의 헌신이 얼마나 큰일을 일구어 낼 수 있는지를 스티븐 팩슨(Stephen Paxson: 1808-1881)은 잘 보여준다.

스티븐은 오하이오주 뉴리스본(New Lisbon, Ohio)에서 일곱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죽었고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아야했다. 가난 때문에 어머니는 아이들을 받아들일 다른 가족을 찾기도 하였다. 결국 스티븐은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나 문제는 언어장애였다. 학교에 간 첫날 스티븐은 너무 흥분해서 자기 이름이나 나이도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웃어대었고 선생님은 그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학교에 오지 말라는 쪽지를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나 호기심이 많고 결단력이 강해서,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읽기를 깨우쳤다. 그는 또한 평생 동안 발을 절었고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그는 모자를 만드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토요일 밤에는 지역 로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

초기에 팩슨은 교회에 출석하지도 않았고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도 아니었다. 그가 30살 때 딸 메리(Mary)가 아빠에게 자기가 상을 탈수 있도록 교회에 가 달라고 요청하였다. 딸의 요구를 물리치기가 어려워 그는 교회의 문에 발을 잠시 집어넣을 정도로만 하겠다고 말하고 교회로 갔다. 그러나 그가 교회에 도착했을 때 딸은 그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렇게 시작되어 결국 그는 주일학교의 소년반 하나를 억지로 맡게 되었다. 주일학교에는 교사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소년들이 자기보다 성경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였다. 팩슨은 자기 자신을 구원도 그리스도도 교회도 필요 없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4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성경말씀을 읽고 여러 가지 주일학교의 자료들을 공부하면서 결국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주일학교를 통해서 개종한 그의 뜨거움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는 모자 제작하는 일을 그만두고 일리노이주 윈체스터(Winchester, Illinois)에 있는 집을 팔고 파이크 카운티의 히코리 힐(Hickory Hill in Pike County)에 있는 소박한 통나무집으로 이사하여 미국주일학교연합회(American Sunday School Union)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사역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전도, 가르침, 상담, 설교, 주일학교 조직, 소책자와 성경, 그리고 다른 자료들을 나누어주는 일이었다. 그의 급여는 하루에 1달러였다. 매우 의욕적인 팩슨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불편함을 보이지 않으며 걷는 법을 연습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말더듬이 스티븐’(stuttering Stephe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손짓과 함께 숨을 깊이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는 연습을 하면서 말더듬을 극복해 나갔다.

팩슨은 말을 타고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여행하면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그는 아이들만 보면 다가가서 주일학교에 오도록 설득하였다. 이 습관 때문에 그가 타고 다니던 말도 아이들만 보면 자동적으로 멈추었다고 한다. 그의 주인이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지나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말도 인식한 것이었다.

겨울 동안에는 많은 여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팩슨은 그 시간을 이용하여 동부지역의 큰 마을들을 방문하여 여러 곳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주일학교연합회의 사업을 위한 기금을 모았다. 이 시간은 그에게 여유로운 시간이 아니었다. 일주일에도 다섯 번 저녁시간을 이용해서 모임을 갖고, 주일에는 3-5번의 연설을 하였다. 순진하지 않은 청중들은 그가 말할 때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으나 그의 문법적 실수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주일학교를 위한 기부자가 되었으며 통나무집, 담배 저장고, 선술집, 댄스 홀 등이 주일학교의 장소가 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말을 타고 100,000마일 이상의 여행을 하였다. 신체적인 어려움은 물론 그는 온갖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여행을 하였다. 나쁜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눈보라 속에서 태어난 주일학교는 결코 흰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A Sunday School born in a snow storm will never be scared by a white frost.) 그의 여행에는 정해진 숙박 시설이 없었다. 그는 또한 오랜 시간 가족과의 이별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유능하고 사랑이 많으며 헌신적이었고 이러한 부재 기간 동안 아이들을 잘 돌보았다.

주일학교의 역사를 서술한 윌리스(Willis)는 그를 ‘어린이의 사도’(the Apostle to the children)라고 불렸다. 그는 모든 지역사회에 주일학교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기회를 포착할 때 마다 부모, 아이들, 그리고 마을 지도자들을 만났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팩슨을 피해서 두 번이나 이사를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사간 장소에 다시 팩슨이 나타나자 그 사람은 팩슨의 강연을 들었고 감동을 받아서 자신과 일곱 아들을 주일학교에 등록시키고 주일학교를 위한 후원자가 되었다.

말년에 그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주일학교연합회의 본부에서 일했다. 도서관의 책을 관리하고 도서관을 위한 기금을 관리했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동안 그와 가족은 ‘순례자 회중교회’(Pilgrim Congregational Church)에 다녔고 그는 계속해서 어린이들을 주일학교에 초대하였다. 주일학교연합회가 주최하는 대회(convention)에 참석할 수 없을 때에는 격려의 편지를 썼다.

일생 동안 팩슨은 1314개의 개척주일학교를 직접 시작했고 1700개의 다른 주일학교 설립을 도왔다. 15세에 팩슨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선교 사업에 합류했고 계속해서 700개 이상의 주일학교를 스스로 설립하였다. 그의 딸 벨 팩슨 드루어리(Belle Paxson Drury)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자서전 ‘열매 맺은 삶’(A Fruitful Life)을 저술하였다.

그는 1881년에 숨을 거두었다. 팩슨은 “미국의 복음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단일한 영향력”(the most important single influence in evangelizing the American frontier.)이라고 불려진다. 가죽으로 묶인 그의 책에는 그가 주일학교에 모집한 83,000명의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한다. 가난, 언어와 신체장애, 그리고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숱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룬 업적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와 축복의 역사였다.

그가 25년간 타고 다니던 말의 이름은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였다. 그 말이 죽자 그는 다음 말을 로버트 레익스 주니어(Robert Raikes, Jr.)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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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윌리암 폭스(William Fox)는 레익스와 같은 날 태어났다. 그는 하층계층의 도덕적 부패와 육체적, 정신적 상황을 깨닫고 영국이 변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배우고 또 그 원리를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활동가인 그는 자신의 비전에 동감하는 사람들을 모았으며,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기관을 조직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폭스는 그의 사역 초기에 주일학교에 대해서 들었으며, 겸손과 지혜를 가진 폭스는 레익스의 주일학교와 경쟁하기 보다는 그와 연합하여 주일학교를 통해서 그의 비전을 성취하는 일에 협력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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