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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짧은 삶, 위대한 삶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16|조회수44 목록 댓글 0

짧은 삶, 위대한 삶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파송된 스코틀랜드의 특사 중의 한 명이었으며, 짧은 삶을 살았으나 자주 ‘위대한 길레스피’라고 불리었다.

그는 에딘버러에서 가까운 파이프(Fife)의 커칼디(Kirkcaldy)에서 한 교구를 맡고 있던 존 길레스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 패트릭(Patrick, 1617-1675)은 글래스고우 대학의 학장을 지낸 열렬한 개혁자였다. 길레스피의 소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으나 그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St. Andrews University)을 다녔고 후에 커칼디 노회의 장학생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633년에 졸업과 동시에 강력한 장로교 신봉자였던 캔무어 자작(the viscount of Kenmure)의 가정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회를 하고 싶었지만 당시 목회자가 되는 것은 주교들의 호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친으로부터 강한 장로교적 성향을 물려받은 길레스피는 주교들의 임명을 받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캔무어 자작의 가정목사 직은 길레스피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 당시 자작의 집을 자주 방문한 사람 중에는 이후 길레스피가 평생을 존경하고 함께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특사로 활약하게 되는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가 있었다. 당시 러더포드가 목회하던 교구는 자작의 집과는 지척이었다. 자작의 집에서 기거하던 길레스피는 러더포드의 뛰어난 학문과 장로교에의 헌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아쉽게도 1634년에 자작이 죽으면서 길레스피는 같은 지역의 또 다른 장로교 귀족인 카실리스 백작(the earl of Cassillis)의 가정목사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러더포드와 길레스피는 학문적 관심과 신앙의 확신 속에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친숙해졌다. 어느 날 그들은 갠무어 자작의 성에 있는 숲에서 무릎을 꿇고 서로 손을 맞잡고 다윗과 요나단 같은 우정을 약속하였다’.

길레스피가 신학교를 졸업한 1633년은 국왕 찰스 1세(Charles I)가 가톨릭적인 의식을 잉글랜드 교회 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교회에도 도입하기 시작한 해였다. 1637년에 스코틀랜드에 도입된 ‘공동기도서’에는 가톨릭적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이 시행될 당시부터 잉글랜드 ‘공동기도서’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새롭게 도입된 ‘공동기도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길레스피의 팸플릿이 나온 것은 이즈음이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요된 잉글랜드의 가톨릭 의식에 대한 비판”(A Dispute Against the English Popish Ceremonies, Obtruded Upon the Church of Scotland, 1637)이라는 제목이었다. 그는 박식한 지식과 간결한 논리로 찰스 1세의 교회정책과 주교제도를 비난하였다. 이 팸플렛은 스코틀랜드 교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네덜란드에서 무명으로 출판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누가 저자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 팸플릿의 저자가 24세의 길레스피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1638년 4월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안수 후에 길레스피는 파이프에 있는 웨미스(Wemyss)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1월 16일에 소집된 글래스고우 장로교 총회에서 ‘왕의 마음은 주님의 손에 있다’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는 설교에서 국왕의 권한과 관련된 민감한 부분들에 대해 거침없는 표현을 쏟아내었다. 그는 심지어 국왕이라도 주님 앞에서 자신의 권위나 독립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국왕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에 그는 스코틀랜드 군목으로 봉사하기도 하였으며 런던평화조약의 교회대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641년 9월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국왕 앞에서 설교를 하였고 이듬해에는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교구인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스(Greyfriars) 교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1643년에 시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잉글랜드의 회의였으나, 이 회의의 배경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맺은 ‘엄숙동맹과 언약’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문서의 핵심은 스코틀랜드 교회가 군사적으로 지원을 하는 대신에, 잉글랜드 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 예배, 규율 그리고 조직을 보호하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교회를 가장 잘 개혁된 교회에 따라 개혁하는 것’이었다.

길레스피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스코틀랜드 특사 중 한 명으로 선정된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스코틀랜드 특사는 총 8명으로 5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로 구성되었다. 5명의 목사는 알렉산더 핸더슨(Alexander Henderson),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로버트 더글라스(Robert Douglas), 그리고 조지 길레스피였다. 길레스피가 스코틀랜드 교회뿐만 아니라 장로교회사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였다. 교회사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고백서’, ‘대소교리문답’, ‘예배모범’ 그리고 ‘정치’는 모두가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탄생하였고 이들 문서의 탄생에는 스코틀랜드 특사들이 깊이 관여하였다. 스코틀랜드 특사들 가운데서도 잉글랜드 목사들과의 논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인물은 길레스피였다.

그가 사는 날 동안에 그는 자주 ‘위대한 길레스피’(Great Mr. Gillespie)로 불리어졌다. 로버트 베일리는 ‘총회에 모인 대표 중 누구도 길레스피처럼 분명하게 요점을 지적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정말 탁월한 인재였다. 나는 그가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보고하였다.

‘신앙고백서’의 제1장은 길레스피의 초안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작성하기가 어려웠다. 회원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기 위해서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다른 이들이 입을 열기 전에 길레스피가 일어서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오, 하나님, 당신은 영이시며,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리에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기도하였고 이 기도는 소교리문답 제4문의 답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교회와 국가의 권위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러더포드는 길레스피에게 말했다. “일어나게 조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법에 의해서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계심에 대해서 방어 하시게...” 길레스피는 반대자의 말들을 요약하면서 하나하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나갔다. 길레스피의 논리와 설득력에 반대자였던 셀던(Selden)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 젊은이는 단 한 번의 연설로 나의 10년간 쌓아온 연구와 노력을 날려 보냈다.”

길레스피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대답을 준비하면서 상세한 메모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번은 그가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길레스피의 노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노트에는 이야기를 준비한 것은 없었고 대신에 라틴어로 쓴 다음 글을 보았다. ‘주여, 빛을 비추소서.’ ‘주님, 도와주십시오.’ ‘주님, 당신의 뜻을 방어하소서.’

1648년 7월에 그는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것은 총회가 그의 공적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러더포드나 베일리도 총회장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 많은 힘을 쏟아 부은 탓인지 1648년 말 30대 중반에 어느덧 그의 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었다. 총회장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그는 폐결핵으로 건강을 잃었고 심지어 설교도 할 수 없었다. 길레스피는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휴양을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2월 17일 3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커칼디 교회당 뜰에 세워졌던 추모비는 1661년 왕정복고로 파괴되었으며 1746년에 다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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