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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수 인디언의 회심 토마스 윌리엄슨(Thomas Smith Williamso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26|조회수38 목록 댓글 0

수 인디언의 회심 토마스 윌리엄슨(Thomas Smith Williamson)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미국 남부 미네소타 지역은 수 인디언(Sioux Indians)에게 속해 있었는데 개척자들은 자기들이 소유하기를 원했다. 1851년에 정부는 그 땅을 매입하였고 또한 원주민들에게 개별적으로 연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수 인디언은 1861-1862년 겨울을 매우 힘들게 넘겼다. 왜냐하면 지난해 여름에 옥수수 수확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원주민 담당 부서에 가서 연금을 받으려하였으나 당국은 기금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원주민들은 돈이 없어서 음식과 물건을 살 수가 없었다. 연금의 지급은 수 주간 연기되었다. 결국 8월 15일 금요일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만약 그들이 배가 고프면 풀을 뜯어먹게 하지...” 수 인디언들은 분개하였다.

연금은 세인트 폴(St. Paul)에 그 다음날 도착했으나 다음 주 월요일이 되어서야 원주민 부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국 시간을 놓친 것이다.

1862년 8월 17일 일요일에 네 명의 인디언이 액톤(Acton, Minnesota)의 한 집에 들어가서 네 명의 백인 거주자를 살해하였다. 네 명의 인디언은 그들의 추장인 리틀 크로우(Little Crow)에게 찾아가서 자기들을 백인을 대항하여 싸우는 전쟁의 선봉으로 삼아달라고 요구하였다. 추장은 이를 허락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단지 백인과 백인들의 기독교를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4주 동안 인디언들은 미네소타 전 지역에서 백인 수백 명을 죽였고, 수천 명의 백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였다. 정부는 인디언의 봉기를 제압하기 위해서 군대를 모집하였다.

결국 1,700명의 인디언 전사들은 투옥되었고, 처음에는 그들 중의 300명을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그 수를 38명으로 줄였다. 그들은 1862년 성탄절 다음날 다른 인디언 죄수들이 보는 가운데서 미네소타 만카토(Mankato)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의 가장 큰 규모의 처형이었다.

그때에는 소수의 인디언만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대부분은 백인의 종교를 싫어하였다. 처형일 다음 주일에 장로교 선교사인 토마스 윌리엄슨(Thomas Smith Williamson: 1800–1879) 박사는 만카토 감옥의 마당에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죄수들은 깊은 눈 속에 발을 묻고 서서 예배에 참여하였다. 윌리엄슨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설교하였다. 그날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그곳에 임하였다.

윌리엄슨은 그해 겨울을 인디언 죄수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에 사용하였다. 곧 죄수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전에 복음 듣기를 거부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열심히 듣게 되었다. 성령의 역사는 그해 겨울에 지속적으로 역사하였고 봄에 거행된 첫 번 째 세례식에는 300명이 세례를 받았다.

다른 죄수들은 미네아폴리스 가까운 포트 스넬링(Fort Snelling)에 분산 수용되어 있었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다른 수 인디언 가족들은 가까운 곳에 야영을 하였다. 윌리엄슨의 아들 존(John Williamson)도 장로교 선교사였는데, 그는 야영지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과 모임을 시작하였다. 몇 개월이 지나자 예수님에 대해서 더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포트 스넬링의 감옥에서도 유사한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1863년 봄, 만카토의 죄수들은 아이오와의 데번포트(Davenport, Iowa)로 옮겨졌다. 단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신자가 되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그들은 찬송하고 기도하였다. 1866년에 죄수들은 석방되었고 그들은 네브래스카의 나이오브라라(Niobrara, Nebraska)에 정착하게 되었다. 존 윌리엄슨은 나이오브라라의 수 인디언들과 함께 하였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그들은 기도와 찬송의 모임을 계속하였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에 대해서 기뻐하였다.

토마스 윌리엄슨은 의사이자 선교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그는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05년에 그의 아버지는 물려받은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하이오의 맨체스터(Manchester, Ohio)로 이주하였다. 토마스는 1820년 제퍼슨 대학(Jefferson College, PA)을 졸업하고 의학공부를 준비하였으며, 1824년에 예일의과대학(Yale Medical School)을 졸업하였다. 그는 졸업 후에 오하이오주 리플리(Ripley, Ohio)에 정착하여 의사로 일했으며 1827년 4월에 마가렛(Margaret)과 결혼하였다. 선교에 헌신하고 싶었던 그들의 소망은 첫 세 아이가 일찍 죽은 것 때문에 더 강해졌다. 그는 신시내티의 레인 신학교(Lane Theological Seminary, Cincinnati)에서 공부하면서 한 겨울을 보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며, 1834년 봄에는 인디언 부족에게 선교할 수 있도록 임명을 받고 계속 원주민 사역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말년에 자기가 세운 교회들과 관계된 10명의 원주민 목사들과 약 800명의 신도들을 돌보았다. 그가 참여해서 수 인디언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은 그가 죽기 약 3개월 전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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