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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4,000명의 감리교 사역자를 세운 사람 프란시스 애즈버리(Francis Asbury)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26|조회수37 목록 댓글 0

4,000명의 감리교 사역자를 세운 사람 프란시스 애즈버리(Francis Asbury)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프란시스 애즈버리(Francis Asbury: 1745-1816)는 영국 버밍햄(Birmingham) 가까운 곳에서 가난한 집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국교회 교도였으나 존 웨슬리에 의해서 일찍 회심하였다. 그들은 프란시스의 유일한 형제인 어린 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았다.

프란시스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프란시스를 어린 시절부터 기도와 성경과 찬송으로 교육하였다. 어머니는 종교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집에 초대하였다. 프란시스는 매우 착한 소년이었다. 그의 주위의 친구들 가운데는 거짓말, 욕설, 싸움을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비행과 나쁜 일들을 혐오하였고 친구들과 있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프란시스의 마음은 편치 않았고 우울했다. 그의 친구들은 프란시스가 가진 생활의 태도에 대해서 계속 놀리고 심지어는 프란시스를 ‘감리교 목사’(Methodist Parson)라고 조롱하였다. 이것은 매우 모욕적인 언사였는데, 그 당시에 감리교는 ‘미친 종교’로 여겨졌고 신봉자들은 자주 박해를 받았다.

프란시스가 17살이 되자 그는 어머니에게 감리교에 대해서 묻기 시작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웬즈베리(Wednesbury)에서 드리는 감리교 예배에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프란시스는 스스로 감리교 예배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의 예배의 자발성에 매우 감명을 받았고 후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곳은 교회는 아니었으나 교회보다 훨씬 좋았다. 사람들은 매우 경건하였고 모인 남녀들은 바닥에 엎드려 ‘아멘’을 말했다. 보라! 그들은 찬송을 불렀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설교자는 기도서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너무나 멋있게 기도하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나 설교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것은 분명히 이상하지만 최고의 방법 같았다.”

곧 프란시스와 기독교인 친구들은 아버지의 헛간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를 하였는데, 그 때 그는 오랫동안 들어오던 구세주를 신뢰하게 되었다. 애즈버리는 곧 그의 구원에 대해서 흥분을 하였고 17살에 지역순회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16살부터 대장장이(blacksmith)의 도제를 시작하였는데 그 일을 병행하였다. 20세가 되면서 그는 전임사역자가 되어 영국 전역에서 순회 설교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존 웨슬리의 부름을 받고 감리교 설교자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미국에서 애즈버리는 자신을 순회전도자로 규정하였다. 그 당시 미국에 있는 감리교 사역자들은 주로 도시에 정착하여 사역을 계속했는데 애즈버리는 이와 반대로 순회전도를 강조한 것이다. 그의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모든 부엌과 상점으로 가라. 나이든 사람과 젊은이들에게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전파하라.”

그는 감리교의 사역자들에게도 같은 것을 행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순회목사(circuit rider)로 말을 타고 회의, 부흥집회, 전도집회 등을 행하였다. 그는 40년 이상 주로 말을 타고 지속적으로 돌아다니며 300,000마일을 여행하였고 아팔라치아 산맥을 여섯 번 이상 넘어 다녔다. 그는 문자 그대로 미국에 집이 없었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거처를 찾았다.

그는 1784년 12월 24일부터 다음해 1월 3일까지 볼티모어에서 회의(Christmas Conference)를 소집하고 ‘감리교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세우고 최초의 ‘감독’(superintendent) 두 명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곧 그는 그 호칭을 ‘주교’(bishop)로 바꾸었다.

애즈버리가 미국에 온 1771년에는 300명의 감리교도와 4명의 사역자가 있었고 주로 대서양 바다 연안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죽은 1816년에는 감리교가 모든 주에 퍼졌으며 214,000명의 감리교도가 있었다. 애즈버리는 4,000명의 감리교 사역자들을 세웠으며 16,000회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그가 한 일 중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주일학교와 관계된 것이다. 미국에서 최초의 주일학교가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에 대한 학문적 논의 중에는 언제나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미국에 주일학교를 도입하고 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장려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감리교인의 교육을 위한 기금을 형성하였고 출판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살아생전 매우 능동적으로 활동하였고 죽기 1주일 전까지도 베개로 받쳐진 상태로 테이블에서 설교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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