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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료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의 이 땅의 풍물

작성자다산|작성시간11.05.21|조회수210 목록 댓글 0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의 이 땅의 풍물

 

 

장날

노점상, 비녀를 비롯하여 면빗, 얼레빗, 참빗들이



엿장수 소년이 커다란 엿목판을 걸치고 있다.



꽈배기 장수의 청년과 소년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의 붕괴사고 장면 
원인은 영추문 바로 옆을 종점으로 하여 운행된 전차의 진동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독뚜껑위에 자배기를 지게에 교묘하게 올려놓았다.
이 당시에는 자배기와 독뚜껑은 특히 여인들이 잘 깨뜨리는 그릇이었다.


닭을 어리에 넣고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 닭장수


연당의 여인


쌍검대무


단오풍경


신윤복의 미인도


옹기그릇 시장


연소답청


청금상령


주사거배


월하정인


월하밀회


 누룩과 찰밥으로 지은 지에밥(술밥)을 햇볕에 펼쳐 놓고 말리고 있다.


복덕방 할아버지들


한강 용산 나룻터


참숫 팔러 가기


1900년 무렵의 조선 호랑이 사냥군들


여성들이 외출때에 쓰는 파라솔, 양산 대용


평양의 장터 길


일본의 조선 철도 기공식
당시 신작로가 전부였던 조선에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반도 곳곳에는 급속히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는 그 길이는 총영장 5,000km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일본은 한국 식민지 정책에서 남은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하 대장군과 천하 여장군


기생의 나들이


서당의 학생들


쌀 티 고르기


장터로 가는 길 


결혼하는 날


소시장


멧돌로 콩을 갈고 있는 남성


쌀 찧고 있는 남성들


삽질하기


양반들의 장기두기, 한 팔이 넘는 긴 담뱃대에 주목.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American Electric Trolley, 1903
남대문으로 노면전차가 지나고 있다.


남대문 앞으로 일본군이 지나고 있다. 1903


괭가리, 징, 놋그릇, 갓, 촛대 등등...


당시의 광화문 정문




북쩍 거리는 장터


한약방















조선시대의 곤장


전당포






주유 청강


바구니 장수


당시 마포나루터의 풍경 

네덜란드인 얀 아드리아니씨가 1904년 평양 시내를 촬영 모습

개천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모습
아직 눈이 남아 있는 계절이다.




멀리 언덕 위 높은 곳에는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띈다.
이 3장의 사진은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품

-- The Flag of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Korean Forces --
By Felice A. Beato

(미해군 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사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帥字旗)가
미해군 콜로라도함(USS Colorado, 배수량 3,425 톤) 갑판에 걸려있다.

어재연 장군기는
136년이 지난 2007년10월에 한국에 10년 동안 임대되는 형식으로 돌아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사족(蛇足) :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6월 10일, 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란, 쇄국정책을 펼쳤던 구한말 흥선대원군 당시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의 전쟁이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1865년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입항하려다 이를 침략행위로 간주한 조선군민에 의해 저지되고 이 결과 셔먼호가 소각되고 선원 전원이 처형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배상과 통상을 요구하며 1871년 아시아 함대 5척을 동원해 조선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다.  이 결과 조선군민 250여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비록 조선은 이 전쟁에서 우세한 미군에 패했지만 미국 역시 조선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조선과의 통상이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40여일만에 중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더욱 더 쇄국의 길로 접어들게 되며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 역시 더 한층 깊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미양요때 전사한 조선군사들 모습
이틀간에 걸친공격에서 5개의 존선궁 요새가 점령당하거나 파괴되고
조선군은 700여명 가운데 250명이 전사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1971
년 이탈리아 베니스 출생 영국 사진작가
펠리체 베아토(Felice Beato, 1832-1909)씨가 촬영한 한국의 선박(Junk, 猛船)

맹선(Junk, 猛船)
조선시대에 실제로 전투에 사용된 선박으로
대.중.소맹선의 세종류가 있다.



Masters of Photography - Felice Beato
Samurai Photographs of the Nineteenth Century





호랑이 사냥꾼으로 불렸던 조선군들은
적에 잡히느니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미군에 의해 잡힌 조선군 포로는 20명도 채 되지 않았다.
부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힌 사진의 조선군 2명은
자신들을 촬영하려하자 이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조선 침공에 나선 콜로라도함내
미군 고위장교들이 조선지도 앞에서 작전계획을 짜고 있다.




미해군측과 협상에 나선 조선 관리들의 모습이다.


1871년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은 우리측 문정관(問情官)이
포로협상단 대표가 미해군 군함에 승선 해
포로송환 협상을 위해 조선 포로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1871년 덕진진에 진입에 성공해 환희하는 미해군.
초지진에서 1박 야영을 한 미군들은 6월11일 이른 아침부터 덕진진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옛 조선시대(1920년대 전)의 의술



눈병 치료
그림을 그리고 눈병이 있는 눈에다 못을 박아 눈에 들어간 액귀를 쫒아낸다.

땅바닥에 사람의 그림을 그린 다음 그 복부에 칼을 꽂아 두어 말라리아를 퇴치했다.

장티부스를 예방하기 위해 소머리와 마늘을 문앞에 둔다.  경기도

전라남도에서는 말라리아 퇴치 방법으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환자의 발바닥에에 쓴다.
환자가 남자인 경우 왼쪽 발바닥에, 여자인 경우 오른쪽 발바닥에다 쓴다.
사진에는 "박대용"이라고 쓰여있다.

맥주병으로 황담 치료
환자가 있는 방 앞에 맥주병을 걸어두면 황담이 낫는다고 믿었다.

환자의 옷이나 모자를 나뭇가지에 걸어두면 홍역이 낫는다고 믿었다.  평안남도

설사퇴치
밥대접 위에 젓가락으로 십자가로 올려 놓고 물을 붓는다.
그리고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경상북도

고추를 처마밑에 걸어 두면 콜레라를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 액운을 짊어진 -  강이나 갈버닥에 버리면
각종 병이 낫는다고 믿어왔다.

영은문(迎恩門) & 독립문(獨立門)

1, 영은문
(Old Chinese Embassy Arch)



영은문(迎恩門)은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당시 조선은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모화관은 1407년(태종 7년)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년)에 모화관(慕華館)으로 개칭하였고,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1537년(중종 32년)에 김안로 등 3정승이 권하여 모화관의 홍살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액자를 걸었다가,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詔)·칙(勅)과 상사(賞賜)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영은문(迎恩門)이라 써서 걸도록 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고쳤다.

2, 독립문
(Independence Gate and the pillars of the old welcoming gate for Chinese embassies, circa 1898)



조선이 독립국임을 상징하는 독립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은 건축물이다.  독립문을 보면 당시 조선인들은 웅장하면서도 색다른 모양을 한 이 문을 세우고 얼마나 대견해 했을지 상상하고도 할 수 있다.  1894년7월25일부터 시작한 청일 전쟁(淸日戰爭)으로 중국과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패권을 다투었으며, 이때 청나라가 패하자 한국은 중국의 수백년에 걸친 오랜 식민지에서 탈출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 했으나...

독립문(獨立門)은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1896년(건양 1년)에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던 영은문(迎恩門)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전 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세웠다.

 독립문은 당시 동일 공사관에 근무하던 스위스 기사가 (일설에는 러시아인 사바틴(士巴津)이) 설계했으며, 공역은 건축기사 심의석이 담당하였고, 노역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으며, 높이는 14.28m, 폭이 11.48m, 두께가 6.25m,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만들었다.


1904년 광화문과 남대문(세번째 사진) 전경
1904년 당시 광화문의 모습과 해태상에서 노는 장난꾸러기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사진들은 미국 외교관 윌러드 스트레이트( Willard Dickerman Straight)씨가 촬영한 것으로
미국 코넬 대학교(Cornell University)는 대학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2008년2월11일









조상이 물려 준 오늘의 남대문 모습은 그렇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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