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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료

장연리 만세운동 기념행사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3.02|조회수36 목록 댓글 0

장연리 만세운동 기념행사

김진태 / 다대중앙교회 은퇴장로

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이장 이원희) 주민 일동은 3.1운동 105주년을 맞아 2024년 3월1일 오전 11시 장연리 3.1운동 기념비 앞에서 장연리 만세운동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장연리 및 이웃 호화리 주민 100여 명과 여러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장연리 길명마을 출신 김점복 시인의 사회로 내빈 소개, 국민의례, 이순주 장연리 3.1운동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공동회장의 인사말과 유경미 매전면장의 기념사, 김진태 향토 문화운동가의 축사에 이어 3.1절 노래 제창과 이원희 공동회장의 만세삼창으로 끝났다.

이날 행사에서 유경미 면장은 기념사에서 3.1운동 당시 장연리 주민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이어받아 5년 전 이 기념비를 건립한 주민들의 노력을 치하했다, 이어서 매전면 청년회(회장 이상일)와 함께 나라 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우리면 전체 마을로 확산시키겠다고 했다.

3.1운동 당시의 상황을 기념비 비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청도군에서 제일 먼저 1919년 3월 11일 장연리 길명의 농민 김집이(金集伊. 28세)는 이 마을 고성(固城) 이씨(李氏) 이원당(李元塘) 문중 제례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한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비분강개를 금할 수 없었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노이만(盧二萬. 34세), 이선이(李善伊. 32세), 이작지(李作之. 30세), 이용술(李龍述. 31세), 최두천(崔斗千. 27세), 이학천(李學千. 29세), 배돌이(裵乭伊. 30세) 등과 함께 그날 밤 9시와 이튿날 밤 9시 두 차례에 걸쳐 연인원 100여 명의 주민을 동원하여 횃불을 들고 마을 골목을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길명 마을의 독립운동가 이동기(李東基) 선생 집 앞에서 다시금 모여 해산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 주재소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인지하고 주동 인물을 수소문하여 주동자 이선이, 이작지, 이용술, 최두천, 이학천, 배돌이 선생 등을 검거하여 고문 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하였지만 모두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김집이 선생과 노이만 선생은 함께 도주하였는데 후일 노이만 선생만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하였고 김집이 선생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행방불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 이후 일제의 갖은 탄압으로 만세운동 관련 선생들의 가족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며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한편 2022년 3월 이동기 선생의 아들 이종악(李鍾岳) 선생이, 지난해 12월에는 노이만(盧二萬) 선생이 각각 독립유공자로 서훈 되어 길명마을은 한 마을에서 두 명의 독립유공자가 탄생했다. 국가보훈부는 노이만 선생의 서훈 증서를 전달할 후손과 묘지를 찾고 있으나 아직 그 유족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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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 / 다대중앙교회 은퇴장로로 釜山서 나서 金海에서 자라고 공직 생활 33년 하면서 거의 多大浦에 살다가 지금은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淸道 와서 ‘산으로 울을 친 마을’에 터 잡고 13년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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