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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열전 ⑨ 대구 경북지역에 심겨진 복음,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6.06|조회수35 목록 댓글 0

선교사열전 ⑨

대구 경북지역에 심겨진 복음,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

1899년 대구 선교지부 설립 내력선교 기틀 마련

부산 경남지역의 복음이 심겨지고 꽃을 피우기까지 호주장로교 선교부 선교사들이 있었다면 대구 경북지역의 복음의 시작은 미북장로회 선교사들의 헌신과 사랑이 이어졌다.

이미 미감리교 선교부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와 호주장로교 데이비스 선교사와 캐나다장로교 게일 선교사가 전도여행을 하면서 대구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지속적으로 대구지역을 오가며 내륙지방에 선교지부 개설을 추진했던 이는 지난 선교사열전(6편)에 소개했던 미북장로회 베어드였다.

 

베어드는 1896년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하고 영남지역 전도를 시작했지만, 같은 해 12월 서울지역 교육담당 고문으로 임명을 받아 대구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대구 경북 내륙이 선교의 중요한 지역임을 알았기에 스스로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자신의 손아래 처남인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 한국명 안의와) 선교사에게 대구선교를 맡기게 된다.

 

제임스 아담스는 1867년 5월 2일 미국 인디애나주 맥코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1889년 위시번 대학을 졸업하고, 1년간 존 홉킨스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4년에 시카고의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한 후, 넬리 디크와 결혼하고 이후 목사 안수를 받아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의 나이 26살이던 1895년이었다.

아담스는 한국에 들어와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이 마련한 부산 선교지부에서 한국어와 한국풍습을 공부하였다.

이후 대구에 부임하고 한 달 뒤인 1897년 12월에 의사인 우드브리지 존슨이 도착하였고, 1899년 10월에는 브루엔이 세 번째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왔다.

당시 최소한 3명의 선교사가 있어야 그 선교지부가 독립된 선교기지로 공인을 받아 독립적인 예산 편성할 수 있는데, 1899년이 되어 비로소 공식적인 대구 선교기지가 세워지고 내륙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대구제일교회 개척, 대구선교의 어머니 교회

1893년 창립된 대구 최초의 교회인 제일교회 구건물. 1933년도에 건립되었는데 이건물은 제일교회의 3번째 예배당에 해당된다.

 

대구에 도착한 아담스는 1897년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대구를 비롯한 경북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대구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후에 교회는 점차 성장하여 1900년에 존슨의 조수 서자명과 정완식, 김덕경 등이 출석하여 세례를 받았다.

 

당시 아담스 선교사는 얼마간 사역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는 외국 선교사들이 대구성내에서 대면한 가장 어려운 세 가지 S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하수처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나는 냄새와 생나무를 태워 밥을 짓고 난방을 해서 나는 연기, 서양인에게 짖어대는 개소리와 무당 굿소리였다고…. 이런 상황에서도 대구제일교회는 크게 부흥을 이루었다.

 

또한 교회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으로 여러 교회가 분립, 개척되었다.

동편으로는 사월교회, 범어교회, 효목교회, 중부교회, 서편에서는 월배교회, 성서제일교회, 감삼교회, 중앙교회, 남편에서는 남산교회, 북편으로는 무등교회, 침산교회, 산격제일교회, 칠성교회 등이 개척과 분립의 과정을 거쳐 세워졌다.

고신총회 설립과 함께 개척되었던 서문로교회의 모교회인 서문교회도 이때 세워졌다.

대구 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전국 주일학교 제4회 대회

 

청라언덕 동산병원 대구 복음화의 요람

아담스 선교사는 존슨 선교사와 함께 의료선교에도 힘썼다. 1899년 제일교회 예배당 옆에 있던 초가집을 고쳐서 제중원을 세우고 서양의술을 토대로 복음을 전했다.

이후 1903년 현재의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으로 이전하여, 풍토병을 치료하고 천연두 예방접종을 통해 대구와 한국의 의료선교에 역할을 감당했다. 지금은 의료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제중원 정원 한 켠에는 사과나무가 심겨져 있다.

 

대구 경북지역은 사과로 유명한 곳으로 알려졌으나 그 개량종 사과가 선교사를 통해 전래된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존슨 의사는 미국서 묘목을 가져와 선교사 사택의 이를 심어 그 열매를 따 먹으며 한국인에게 나누어 주었던 일이 계기가 되었다. 초창기 과수농가 대부분은 교인들이었었다.

 

제중원은 현재의 동산병원이 되었으며, 지금의 대구제일교회 터, 동산병원 터가 마련되었다. 원래 이곳은 가난한 자들이 장례도 치르지 못해 시신을 몰래 묻던 자리였는데 긴 시간이 지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시간표에 달하자, 이곳은 대구 복음화의 중심지와 요람이 되었다.

 

1922년 아담슨은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복음전도기금’을 설립하여 경북지역 선교에 기틀을 마련했다.

사실 1923년에 대구 선교지부를 은퇴하고 귀국할 예정이던 그는 대구 복음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자신의 남아 있는 모든 것을 이 땅에 바치고 떠나고자 했다.

한국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담스의 마지막 헌신으로 마련된 이 기금은 경상북도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을 지원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대를 이어 전해진 한국 사랑

아담스-북장로교 대구 선교부 소속 선교사 단체사진 1907년 뒷쪽 흰양복의 서 있는 사람이 아담스 선교사

 

한국과 대구를 그토록 사랑한 아담스의 신앙과 정신은 그의 가족을 통해 계속되었다. 아담스의 부인 넬리는 '경상북도 기독교인의 어머니'라 불린다. 그녀는 대구제일교회 부인주일학교 교장을 맡았고, 전도부인을 담임했다.

이뿐만 아니라 부인 사경회 인도와 순회전도를 직접 했고, 대구 남산동의 신명여학교와 정규 전도부인 강습회 등에서 강의하면서 복음화에 힘썼다.

또한 장남 안두화 선교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를 이어 1921년 한국에 들어와 황해도 재령에서 활동하였다.

 

에드워드는 1925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활동한 대구 선교지부로 자리를 옮겨 대구성경학교 교장과 농촌 선교사로 활동하다 일제의 강제 추방령에 의해서 한국을 떠났다가 광복 후 다시 대구 선교지부에 부임하여 1954년 계명대학교를 설립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 선교사 열전 이야기를 연재하며 전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의 ‘부산지방에서의 초기 기독교’(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과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하였다. 이밖에 등의 사료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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