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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자료

선교사열전 ⑫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6.24|조회수38 목록 댓글 0

선교사열전 ⑫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호남 선교의 관문 군산 복음에 물들다

군산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전키 선교사(1865. 12.13 ~ 1908. 1. 2)

 

1891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내쉬빌에서 강연할 때 남장로교회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선교에 도전을 받았다.

윌리엄 전킨(전위렴, William McCleary Junkin) 선교사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나 워싱턴 앤 리 대학교(Washington & Lee University)와 유니온 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를 졸업하고,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 7인의 일원으로 1892년 한국에 들어왔다.

명문대를 졸업한 그는 1891년 안식년차 미국에 들른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보고회에서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듣고 자원해 조선을 찾았다.

 

앞서 소개했던 레이놀즈 선교사를 비롯해 ‘7인의 선발대’라 불리는 선교사들은 한국, 특별히 호남지역에서 선교의 기틀을 잡는 데 공헌했다. 이들의 헌신을 통하여 호남에 복음의 문이 열렸으며 의료, 교육 등을 통하여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호남선교의 관문이라 불리는 군산지역은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선교사가의 섬김이 자리하고 있다.

 

1896년 그가 찾은 군산지역은 약 100여채 정도의 초가로 구성된 작은 어촌이었다. 길은 좁고 구부러졌으며 부두도 없었고 우체국, 전신국도 없었다.

언덕에는 나무가 없었으며 들에는 풀이 없고 황량했다. 전킨 선교사는 이곳 군산에서 복음의 교두보를 만들며 호남지역 선교의 문을 열었다.

전킨 선교사 가족 (1907년 가을, 전킨 선교사와 에이번 여선교사, 그리고 자녀들:에드워드, 윌리엄, 마리온, 토야, 유복자 알프레드는 모태 안에)

선교기념비와 표지석 (2017년 군산기독교연합회 전킨기념사업회가 수덕산에 세운 전킨, 드루 선교사 군산선교기념비와 1895년 최초 군산신항 도착 지점에 세운 표지석)

말을 타고 전도하러 다닌 전킨 선교사.

 

전킨…한국선교를 꿈꾸다

 

1891년 10월 레이놀즈, 존슨과 함께 유니온 신학교의 대표로 내쉬빌 대회에 참석한 전킨은 그곳에서 북장로교 한국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감동적인 연설을 듣게 된다.

언더우드가 환등기로 보여주는 한국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윤치호가 외치는 연설을 들으면서 전킨의 마음에는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 전킨과 가족들은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여 ‘7인의 선발대’와 1892년 11월 3일 제물포에 도착, 4일 목요일 아침,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에 입성했다.

이들은 약 10개월 동안 서울에서 머물며 어학공부와 수련하며 남장로교 선교 담당지인 호남지방 선교를 위한 준비를 했다. 당시 전킨은 한국과 한국 선교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얻었다.

또한 전킨은 개인적인 경사로 축하받기 바빴다. 1893년 6월 초 아들 조지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군산에서 사역을 꿈꾸다

 

1895년 4월 전킨과 의료선교사 드루, 두 선교사는 한국인 안내자 1명, 요리사 2명과 함께 한 달간 군산에 머물게 된다. 이들을 통하여 군산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전킨과 드루는 기쁜 마음으로 1895년 3월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왔지만 그 여정이 풍랑이 심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다.

전킨과 함께 활동한 드루 의료선교사가 1896년 구입한 선교선.

 

그러나 군산 어민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이방 선교사를 환대해주었다. 우선 이들은 배가 닿는 선창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배처소와 진료소를 차리기 위해서 수덕산 근처에 초가집 두 채를 50달러에 매입했다.

선교사 일행은 한국인 안내자와 함께 전도 겸 치료를 위하여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자 환자들과 함께 온 보호자들이 몰려들어 전킨과 그를 돕는 조사들은 바쁘게 일손을 도와야 했다.

그리고 진료 시간이 되면 드루는 한 사람씩 차례차례로 진료를 하였는데, 이렇게 군산의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때마침 전킨 선교사의 전도 강연을 듣던 김봉래 씨와 송영도 씨는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하고는 자신에게 문답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하였다.

그들은 후에 군산교회의 초기 멤버가 된다. 그렇게 군산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고 있었다.

 

전킨과 드루는 그해 9월 다시 군산으로 내려가 본격적인 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의료선교사 드루는 한 달간 머물다 서울로 돌아갔지만 전킨은 계속하여 1896년 1월까지 머물면서 아예 자신의 가족과 함께 살 준비 3월 28일 가족들과 서울을 떠나 군산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군산선교

 

나흘간의 바다 여행 끝에 4월 5일 어렵사리 군산에 도착한 전킨 가족은 짐을 다 풀 겨를도 없이 선교사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송영도, 김봉래, 차일선과 같이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동시에 그들에게 세례를 요청한 것.

지난 번 만남 후로 기독교를 알기 원했던 간절한 그들의 소원대로 전킨 선교사는 세례 교육을 실시했다. 매 주일 그들에게 회개, 기도, 믿음, 주일, 세례, 성만찬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3개월간 그들을 가르친 후 송영도, 김봉래 두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꾼으로 전킨을 찾았지만 두 사람은 열정으로 학습하였고, 호남 최초의 세례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전킨의 호남 선교의 첫 열매가 맺어진 것. 이후 매 주일 전킨의 집은 예배당이 되어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군산 교회 최초 예배처소로 사용된 전킨의 집.

 

복음의 황무지였던 군산을 옥토로 만들고 복음의 씨앗을 심는 위대한 사역이 수덕산 기슭의 군산교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군산교회와 군산선교부의 시작이다.

전킨 선교사는 1895년 호남 최초로 군산 일대에서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웠다. 그가 세운 교회는 구암교회, 개복교회, 지경교회, 남전교회, 송지동교회 등이다. 또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중, 영광여고), 영명남학교(현 제일중·고등학교), 군산 예수병원 등을 설립했다.

 

전킨의 와병과 시드니와의 작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던 군산선교에 문제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사역하던 전킨 선교사가 쓰러진 것. 전킨은 6개월 정도 이질로 인하여서 고통 속에 지냈다.

1898년 유진 벨 선교사의 편지에 의하면 남장로교 선교부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이 ‘전킨 선교사의 건강회복’ 이라고 할 정도로 전킨의 건강이 나빠지게 된다.

 

전킨 선교사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킨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즈음에, 막내 아이 시드니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한 것이다.

전킨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하며 길선주 목사 등 한국 최초 목회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을 계기로 호남 지방 대부흥운동을 주도했으며, 1908년 1월 2일 43세를 일기로 한국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선교 기간 조지와 프랜시스, 시드니 등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어야 했다.

첫째인 조지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었는데, 둘째 시드니마저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것. 전킨은 몹시 슬퍼하며 시드니를 군산 땅 궁멀에 묻었다.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군산을 찾았지만, 사랑하는 자녀들을 먼저 보내게 되는 큰 슬픔을 두 차례 경험한 그는 결국 1898년 여름, 남장로교 선교부의 권고대로 일본으로 향하여 잠깐의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도 잠깐 군산선교를 향한 열정, 군산교회를 향한 마음으로 인하여 전킨 선교사는 큰 휴식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군산으로 돌아왔다. 전킨에게는 또 감당해야할 중요한 사역이 있었다.

 

궁멀선교부 폭발적인 부흥

 

우여곡절 끝에 12월 궁멀의 구암 언덕 위에 서양식으로 세워진 전킨의 주택과 군산선교부가 건립되었다. 추운 겨울이지만 완공기념으로 전킨의 넓은 거실에서 주일예배를 새롭게 드렸다.

물론 군산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교인들도 주님의 날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먼 거리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했다.

이미 군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던 김봉래와 송영도는 다른 교인들보다 더 열심으로 봉사하였으며, 다른 교인들도 뒤질세라 주일이 되면 일찍이 교회에 출석하여 장년반 성경공부에 참여했다.

궁멀 선교부의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그렇게 교인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고 예배 장소가 비좁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군산교회 교인들은 새 예배당을 세우기로 결의하고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건축헌금을 걷기 시작했다.

전킨 선교사의 부인 레이번 선교사와 주일학교 여학생반 학생들.

 

선교의 열매 최초의 한인 목사 후보생 배출

 

이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전킨을 군산교회 교인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그만큼 군산교회 교인들은 전킨 가족을 사랑했었다. 이러한 모습은 6년 전 처음 군산에 발을 내딛었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그때는 미지를 향한 두려움과 선교사역에 대한 기대였다면 지금은 사역을 향한 확신과 설렘이 가득했다.

전킨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받기 위하여 준비되었음을 알고 이들에게 하루에 한 명당 한 시간씩 8일 동안 세례 문답을 진행했다. 안식년 동안 상황이 악화된 것 같았지만 전킨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1902년에는 77명이 세례를 받고 1903년 전킨은 불 선교사와 함께 군산선교부 내에 있는 교회들을 차례로 순회하였다.

남차문교회(현 남전교회)를 시작으로 송지동교회, 성말교회, 만자산 교회를 방문하며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세례문답을 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군산선교부에는 162명의 세례교인과 65명의 세례지원자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된다.

또한 1902년 하반기부터 1903년 상반기까지 1200장의 전도지, 1700권의 성경과 찬송가, 소책자, 그리고 5백 권의 신앙달력이 판매되었다. 게다가 최초의 한국인 목사 후보생이 나오기도 했다. 날로 부흥하고 있었다.

 

교육선교 영명학교 한국 독립에 이바

 

전킨은 복음 전도, 의료 선교 뿐 아니라 교육 선교에도 힘쓴다. 군산의 남학교는 전킨 부인인 레이번에 의해서 1902년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전킨의 서재에서 시작된 이 모임은 1903년 선교부에 의해서 전킨이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고 학교 운영이 공식화되었다. 가을부터는 단기선교로 온 유진벨 선교사의 두 명의 여동생들이 전킨 부인을 도왔고, 전킨도 가세하게 된다.

전킨은 영어성경과 구약성서역사 그리고 작문을 가르쳤다. 군산의 남학교는 정기적으로 25명 정도의 학생들이 출석하였는데 학교 운영 조건이 열악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증가하였다.

이 영명이라는 이름에는 선교와 개화 즉 교육에 두고 있어 학교 경영 목적이 장차 기독교계 지도자를 양성할 것을 목적으로 자라갔다.

전킨이 세운 이 영명학교를 통하여 독립운동, 의료, 교육, 사회사업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배출하고 서울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교육 선교를 통하여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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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호남 최초의선교사 전킨’(서종표 편저), ‘’미 남장로회 한국선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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