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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열전 ④ 순회전도 열정으로 교회와 사람을 세우다 - 경남 및 마산 복음화의 선구자 앤드류 아담스(Andrew Adamso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5.15|조회수41 목록 댓글 0

선교사열전 ④

순회전도 열정으로 교회와 사람을 세우다

 

경남 및 마산 복음화의 선구자 앤드류 아담스(Andrew Adamson)

 

부산 경남지역의 복음화 뒤에는 호주장로교회의 특별한 헌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직에 이어 호주장로교회 여선교회연합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고 그렇게 한국 특별히 부산 경남지역은 호주장로교의 소명의 땅이 되었다.

 

앞서 소개했던 1차 선교사 데이비스에 이어 2차 선교사 페리와 포셋 그리고 빅토리아장로회 청년연합회가 파송한 맥케이 목사와 그의 부인 사라와 함께 찾아온 멘지스에 이어 호주장로교회는 3차 선교사로 앤드류 아담슨(Andrew Adamson, 1860~1915)을 파송했다. 그는 1894년 5월 아내 엘리사와 두 딸 바이오렛과 마블과 함께 부산 땅에 찾아왔다.

 

아담슨은 부산에서 15년, 마산에서 5년간 사역하며 경남지방 복음화에 기여했다. 부산에 거주하면서 경남지역을 순회하며 20여 개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특히 마산 문창교회 설립하고 마산 창신학교 및 의신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도 헌신하였다.

 

3차 선교사 아담스 파송 시련과 은혜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청년연합회 선교부는 데이비스 선교사에 이어 그들이 파견한 멕케이 선교사마저 아내를 잃고 그 또한 건강이 악화하여 한국 선교 2년 만에 귀국하자 다시 후임자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호주 내에서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한국으로 보낼 선교사를 스코틀랜드에서 구하기로 하고 런던 장로교회 소속 아담슨을 추천받아서 적임자로 영입하였다.

 

아담슨은 1884년부터 1889년까지 5년간 영국성서공회 중국 북부지역에서 사역했기 때문에 동양의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리고 인도 장로교 신학교에 수학하였고 런던 노회로부터 안수를 받아 한국에서 사역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부산에 찾아온 아담슨의 초기 선교 활동은 순탄치 않았는데, 이는 호주여선교회연합회에서 파송 받아 좌천동에 거주하던 여성 선교사들과의 갈등 관계 때문이었다. 영국 출신의 아담슨이 호주 출신의 여선교사들에 대한 감독권을 행사하고 재정에 간섭하려 하였다. 또한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아담슨이 종종 말과 행동에서 문제를 일으켜 여선교사들의 불신이 높아졌다. 이는 서로 간에 인간적인 관계가 악화되어 끝내는 어렵게 시작한 호주 선교부의 존폐문제로까지 확산하였다.

 

갈등은 부산지역에서 활동하던 엥겔 선교사(왕길지)의 중재로 봉합되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담슨의 아내 엘리사가 부산에 온 지 1년 6개월 만에 심장병으로 건강이 악화하였다. 그리고 1895년 11월 27일 아침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엘리사는 데이비스, 맥케이 부인에 이은 호주 선교부의 세 번째 순직선교사였다. 이 소식을 접한 호주 멜버른의 성도들은 아담슨에게 기도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1년 후 아내의 친구 페인과 재혼했다. 페인은 엘리사의 소식을 듣고, 아담슨을 돕기 위해 청혼하였고, 1896년 11월 부산으로 와서 아담슨과 결혼하고 아담슨의 사역을 도왔다.

창신학교

마산 문창교회

 

초량교회 부흥과 경남지역 순회전도

 

멕케이 선교사가 구입한 초량동 사택에 거주하면서 사역을 시작한 아담슨은 벽돌로 큰 집을 건축하여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의 신축 집에는 나날이 성도들이 증가하였으며, 1896년 3월에는 성경공부반을 개설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1899년 안식년 때 호주로 가서 기금을 모아 1900년 초량교회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여 더 많은 성도가 예배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초량교회를 도우며 사역하면서, 부산을 기점으로 인근 양산(양산 교회, 빈화리교회), 함안(사촌 교회, 윤외리 교회, 사북 교회), 의령(서암 교회 등 7개), 고성(배둔 교회, 의성 교회), 통영(동향리 교회, 대화정 교회) 등 경남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가까운 곳은 조랑말을 타고 순회 선교를 진행하였고, 먼 곳인 통영과 거제는 통통배를 타고 오가며 사역하였다.

 

아담슨은 한국 순회전도에 대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태도 등 당대의 중요한 함안 문제들에 대한 일차적 견해를 얻을 기회를 준다는 점,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얻은 지식이 복음의 메시지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아담슨은 마산의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량에서 사역하면서도 틈틈이 마산을 방문하여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에 의하면 부산의 초량에 거주하고 있던 아담슨은 마산에 선교지부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마산지역을 수시로 방문하면서 순회전도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901년 김마리아와 김인모 등 여자 7명이 신자가 되었고, 1903년에는 김주은과 그의 아들 이승규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또한 아담슨은 성호리에 한옥을 한 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문창교회의 전신 마산포교회의 출범이 되었다.

 

이후 1909년 호주 선교부가 마산선교지부를 설립을 추진하는데 그의 공로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 선교 기간인 1909년부터 1914년까지 5년간은 마산에 거주하면서 헌신하였다.

일신여학교일신여학교

순회전도순회전도

 

복음 개척자 사람을 세우다

 

아담슨은 마산에서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는 이승규와 함께 1906년 5월 17일 마산포교회에서 ‘독서숙’이란 이름을 걸고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이 독서숙은 1909년 8월 19일 초등과 4년 과정으로 인가를 받아 창신학교로 교명을 정했는데, 이로써 마산지방의 최초의 기독교교육이 시작되었다.

 

창신이라는 이름은 옛 지명 문창리에서 ‘창’을 따고, 믿음의 학교란 뜻을 더하기 위해 ‘신’이란 글자를 더해 지은 것이다. 아담슨은 이곳에서 초대교장으로 섬겼는데, 당시에 여학생 28명을 포함해 108명의 재학생이 있었다고.

 

이후 창신학교는 고등학교가 되었고 9기 졸업생까지 배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과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을 때 호주선교회가 인수하여 호신학교로 학교명을 변경하였다. 1923년 붉은 벽돌 사옥을 건립하였는데 당시 마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2층 건물로 지어졌다. 건물이 완성되면서 학교 이름을 라이얼 기념 중학교로 명명했다. 창신학교 2대 교장 라이얼(Lyall, 라대벽)이 1921년 순직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였다.

 

1913년에는 남녀공학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로 인해 의신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의신여학교는 호주장로교회 2차 선교사 맥피가 초대교장으로 1937년 별세할 때까지 재직하며 학교를 발전시켰다.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는 마산 인재의 보고라고 할 정도로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였다. 독립운동을 감행한 의열단 김원봉, 경남 최초의 공학박사인 이한식, 산토끼 작곡가인 이일래와 극작가인 이광래 두 형제, 웅천만세 시위의 주동자 김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등이 마산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처럼 아담슨은 부산, 경남지역에서 순회 전도와 교육 선교에 20년간 봉직하다 병이 깊어짐에 따라 선교부의 권유에 의해 1914년 3월 은퇴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55세 아까운 나이로 영국 런던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선교사 열전 이야기를 연재하며 전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의 ‘부산지방에서의 초기 기독교’(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과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하였다. 이밖에 맨켄지선교회, 호주선교사묘원 경남선교120주년 기념관 등의 사료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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