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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열전 ⑥ ‘윌리엄 베어드’ 부산에서 평양까지 사역 - 부산진교회, 초량교회 등 경상지역 순회 선교사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5.23|조회수46 목록 댓글 0

선교사열전

‘윌리엄 베어드’ 부산에서 평양까지 사역

부산진교회, 초량교회 등 경상지역 순회 선교사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부산은 당시 조선으로 향하는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지나는 복음의 관문이었다. 호주장로교회 선교부에 이어 미국 북장로교회(PCUSA)도 부산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첫 선교사가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1862-1931) 한국명 배위량이다. 그는 1891년 1월 내한하여 호주장로교 선교사들과 동역하며 부산과 경남지방 기독교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부산을 선교 구역으로 배정받은 베어드 선교사는 1896년까지 경상도 지역을 순회하며 대구에 선교지부를 개척했고, 이후 서울을 잠시 거쳐 1897년 평양으로 자리를 옮겨 숭실학당을 세우고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

 

 

첫 북장로교 선교사

 

그는 1862년 미국 인디애나에서 출생하여, 1885년 하노버대학과 1888년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베어드는 하노버대학에서 1889년에는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1890년 11월 18일 애니 라우리 아담스와 결혼하고, 바로 그날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부산에 도착한 날이 1891년 1월 29일 목요일이었다. 그날 부산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서울 이외의 선교지부 개척하기로 하고 북부지방에는 평양을, 남부지방에는 부산을 그 대상지로 선정했다. 베어드는 부산지부 개척자로 지명되었고, 한국인 어학선생과 함께 내려왔다.

 

이상규 교수는 부산에 정착한 베어드 선교사는 자신의 사역 방향을 4가지로 구상했다고 전했다.

 

△기독교 신자 가정을 찾아 이들을 보호하고 후원한다. △사랑방을 통하여 지역주민과의 접촉을 강화한다. △성경과 기독교 문서의 보급을 통해 복음을 전파한다. △경상도 지역의 순회 전도여행을 통해 지역주민들과 접촉을 통한 선교. 이중 베어드가 가장 중시했던 영역은 순회전도였다. 베어드는서상륜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부산을 출발해 하루에 16~32km를 걸으며 밀양, 대구, 상주, 안동, 경주를 돌아 울산을 거쳐 부산에 돌아오는 496km의긴 전도여행을 다녔다. 회심자를 얻어 세례를 베푸는 일은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1891년 베어드가 부산진에 한옥을 짓고 그해 11월에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예배를 드림으로 경남지역 최초의 장로교회인 부산진교회를 시작했다. 1892년 4월 15일경 영주동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미국북장로교회와 호주장로교선교부 간의 선교구역 협정에 따라 초량지역이 북장로교 관할지역으로 개편됨에 따라 아담슨은 초량지역의 교회를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하게 되어 영주동의교회가 통합되었고, 이것이 지금의 초량교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내륙지방을 여행하는 동안 양산 물금교회, 밀양 유천교회, 청도 화양교회, 영천 조곡교회를 세웠다.

부산, 대구, 서울, 평양까지

 

베어드 선교사는 1895년 말부터 대구에 진출하여 대구지부를 개척했다. 본격적인 영남 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해 11월 베어드는 서울선교지부 교육 담당 고문으로 발령이 나서 대구 선교를 처남 제임스 아담스에게 인계하고 대구를 떠났다. 교회가 빠르게 성장해 전도자를 훈련할 교육기관에 대한 요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서울의 경신학당도 확장되어 학교 사역에 경험이 있는 베어드를 선교부에 추천해 그를 초대하였다. 교육 사업과 함께 베어드는 첫 휴가를 떠난 마펫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평양을 비롯한 북쪽 지방 복음 전도 사역에 할애했다.

그는 평양과 한국의 최북단이자 북쪽 관문인 의주 지역을 순회하며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로 조직될 준비가 되어있는 여러 모임을 발견했으며, 여행 중에 교인이 되려는 후보자를 문답하고 세례를 주었다. 복음과 생명을 나누었다. 베어드는 평양과 이북지역에서 교육사업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고 이듬해 평양으로 옮겨 숭실학당을 시작으로 학교건립에 힘을 썼다.

 

1897년 10월 베어드의 사택에서 13명의 학생을 모아 시작한 학교가 바로 숭실대학이다. 이 땅에 예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참된 교사와 교역자 양성을 설립 목적으로 중등교육기관으로 문을 연 숭실은 이 땅에 고등교육 출범의 단초를 열었다.

이후 1906년 9월 15일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경영에 참여한 가운데 숭실에 대학과를 설치하여 12명의 학생을 1, 2학년으로 운영하였다. 이로써 숭실은 우리나라에서 정규 대학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한국에 온 지 40주년을 맞은 1931년에 장티푸스에 걸려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전염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보건법에 따라 화장되어, 평양 숭실학교 구내에 안장되었다.

초량교회

부산진교회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지에 있는 베어드 부부 기념비와 일가족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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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열전 이야기는 전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의 ‘부산지방에서의 초기 기독교’(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과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하였다.

이밖에 맨켄지선교회, 호주선교사묘원 경남선교120주년 기념관 등의 사료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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