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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8/ 요한복음 6장 26절-29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3.21|조회수32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8
요한복음 6장 26절-29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우리는 바로 앞 절에서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는 무리들의 말은, 놀라움과 예수님을 만난 안도감, 그 외 여러 감정이 뒤섞인 말로 이해할 있었다. 특히 그 중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들의 질문에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그들의 마음을 바로 꿰뚫어 보시며 답을 하고 계신다. 그렇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고, 또한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을 해 줄 임금, 즉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말이 하나 더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내가 ‘진실로 진실로’(Ἀμὴν, ἀμὴν)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이다. “진실로 진실로”라는 이 두 번 반복된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사용하시는 수사방법(修辭方法)으로, 앞으로 말씀하실 것에 대하여 매우 주의하여, 집중하여 들을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보면, 바로 “Amen, Amen”이라는 표현으로 주님은 여기 26절 이외에 32, 47, 그리고 53절에서도 사용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무리들에게 진정으로 말씀하실 강화(講話)의 요지는 무엇일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이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주님의 기대와는 아직 멀리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27절에서 “썩을(ἀπολλυμένην)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ζωὴν αἰώνιον) 있는(μένουσαν/ 견딜)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주님을 찾고 있는 목적과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썩을 양식을 위한 것이었지만, 주님은 이렇게 썩을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않을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식을 공급하실 분이 바로 ‘나’(인자/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印)치신(ἐσφράγισεν) 자라고 하신다.

사실 여기 모인 무리들은 그들이 처음 주님을 찾아서 헤맨 목적과, 이제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통하여 듣는 말씀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쩌면 생뚱맞은 말이어서 분명히 어리둥절했을 것 같다. 이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인자”,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인치신 자”와 같은 말은 이들에게는 분명히 생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6장의 요지는 바로 이 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에, 주님은 이제 무리들을 향하여 이 말이 갖는 의미를 하나씩 쉽게 강화(講話)하려 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28절에서 다시 주님께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Τί ποιῶμεν)라고 한다. 이들의 질문이 좀 진일보 한 것인가? 의문이 드는데, 주님은 29절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답변을 하신다. 오늘 우리가 택한 여기 성경 구절에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질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는 결론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τὰ ἔργα)이라는 단어에 큰 관심을 기우릴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무리들에게 “일”이라고 하면 그냥 육신의 일 정도로 알았는데, 여기서 주님께서 말하시는 “일”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특히 여기서 말하시는 일이란 여러 가지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τὰ/ the)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일이 무엇인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누구인가?”부터 검토해야 하는데, 무리들은 아직도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바로 주님 자신임을 이제 분명히 말하시려는 한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무리들은 잘 모르지만 주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며, “인자”이시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가 인치신 자”이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적인 힘을 가리키며, “인자”(人子)란 인성(人性)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바(본래 이 말은 人性과 神性을 含意하고 있음), 그가 살과 피를 희생하셔서 속죄하여 주시므로 영적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게 하시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며,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가 인치신 자”란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시고 인정하시고 신임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하는 “그 일”인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직 무리들은 이와 같은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하니 육신의 양식만 해결하는 능력자로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도에선 생명의 약식을 통한 구원의 길을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일”이라는 단어로 이 사실을 설명하려 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점점 수위를 높여 가면서, 하나님의 일을 무리들에게 계속적으로 강화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무리들에게 이 상황에서는 믿음이 없다는 말보다는 “주님의 주님 되심”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τὰ ἔργα τοῦ Θεοῦ)이란 어휘로 무리들에게 “주님의 주님 되심”을 가르치실 때에 우리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무리들과 달랐을까? “주님, 당신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며, ‘인자’이시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가 인치신 자’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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