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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11/ 요한복음 6장 37절-40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3.24|조회수33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11
요한복음 6장 37절-40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바로 앞에서 주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주님께 오는 자는 결코 주리자 않고 또한 주를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상고한 바 있다. 그런데 37절에서는 35절에서 말한 “내게 오는 자”, “나를 믿는 자”는 그 스스로 주님께 올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스스로 주님을 믿을 수 있는지? 여기에 대한 질문에 신학은 여러 가지로 답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내게 주시는 자는”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시고 계시기에, 이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리라 본다.

주님께 나아오는 자, 주님을 믿는 자는 그 스스로의 의지로 그의 주관에 따라 그 결과가 드러나는 것일까? 매우 해묵은 논쟁이지만, 이와 같은 논쟁은 교부시대 Augustinus vs. Pelagius의 논쟁 속에서, 그리고 근세에는 Luther vs. Erasmus, Calvin vs. Arminius 사이에 논쟁이 특히 유명하다. 이러한 논쟁 속에는 인간의 구원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자유의지가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전자는 원죄를 인정하고 자유의지를 제한하고 소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반면에, 후자는 원죄는 사실상 소극적으로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함으로써 생긴 논쟁이다. 그리고 이 속에는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문제이며, 예정과 섭리 및 선택의 교리를 믿는 쪽과 믿음은 인간의 행위로, 그가 스스로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따라서 예정론도 그렇게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쪽의 논쟁이다. 지면관계상 이들 논의를 전부 여기서 언급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빙크(H. Bavinck)의 “개혁교의학”의 “죄와 사망”에 관한 논의를 살피고,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서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의 관계를 살피려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좁게는 진리와 의, 거룩함이라는 “원시의”(原始義)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완전무결한,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지으셨다. 따라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명령을 어겨 범죄 하였고, 결국 타락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타락 이후에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 양심, 도덕법 그리고 의지와 이성적인 작용이 존재하게 하셔서 비록 원시의라는 하나님의 형상은 그 빛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바빙크는 이를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한 바와 같이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사람은 동물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타락하여 죄를 범하게 되었는가? 죄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와 함께 천사도 같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창조 이후에 천사들이 먼저 반역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타락한 결과 사탄 마귀가 되었으며, 이러한 사탄 마귀가 뱀을 이용하여 하와가 시험적인 명령에 불순종하게 만듦으로 죄의 길에 들어서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하와로 시작되는 불순종, 죄는 마귀를 통하여 의심을 갖게 하고 그 결과로 불순종에 이르게 한 것이 바로 죄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하와가 꾀임에 빠졌기 때문에 아담은 무죄하다는 말은 할 수 없다(죄의 보편성). 이처럼 타락의 역사와 죄의 기원의 역사는 뱀의 꾀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성을 어둡게 하는데서 시작하여 상상을 부추기고 마음의 정욕을 자극하여 결국 의지의 행동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가 타락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타락의 가능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 그리고 “인류는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어째서 죄의 악과 비참의 악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답변들이 있어 왔다. 그 논증의 예를 보면, (1)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죄는 사람의 속이나 사람의 바깥에서부터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바깥쪽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라 본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경우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죄책을 상황의 탓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은 하나의 허구라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또 다른 하나의 견해, 말하자면 (2) 죄의 기원을 감각적인 본성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등장하였다. 즉 사람은 혼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동물적인 육체를 지니고 있어 항상 특정한 죄악 된 성향에 이끌림은 물론, 더 나아가 동물적인 성향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는 이러한 성향의 당연한 결과로 본다. 따라서 이들이 보는 죄란 동물적 성향을 억제하지 못한 결과로 나온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또한 혹자는 (3) 빛의 신과 어둠의 신,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영원부터 공존해 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둠이 전혀 없고 태초에 만물을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으며, 하나님의 지혜는 항상 선하시고 옳으시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창조사역 속에는 보시기에 좋은 것뿐이었기 때문에 죄의 시작은 하나님께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죄란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재능과 에너지들을 방해하는 것이요, 그것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그 시작은 시험적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죄의 기원과 그 본질에 관하여 철학이나 과학이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멀리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것, 즉 죄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는 것이며 시험적 명령에 대한 불순종으로부터 왔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 최초의 죄는 뱀의 꼬임으로부터 하와에게서 나타났지만 이는 동일하게 아담에게도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죄의 기원과 그 본질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임을 이제 확인하려 한다. 말하자면 죄의 보편성이다. 사실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죄 없이 출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각기 약점들과 결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 누구도 양심이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류가 져야할 가장 무거운 짐이란 바로 죄책의 짐이며, 철학자들 역시 모든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창세기의 타락기사를 제시한 후에 죄가 어떻게 인류 속에 퍼져가고 증가했으며, 또한 어떻게 결국 홍수 심판이 불가피한 상태가 되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홍수 이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또한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성도들이 한결같이 죄와 수치에 거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왕상 8:46; 시 14:3; 53:3; 143:2; 잠 20:9; 전 7:20; 렘 3:25). 물론 신약 성경도 예외가 아니다. 요한이 처음으로 외쳤던 것도 회개하라고 한 것이었으며, 주님 역시 세상에 오심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했다. 바울사도는 어떤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다 치우쳤다며(롬 3:19-20), 모든 사람은 다 함께 죄 가운데 있다고 했다(롬 3:9; 11;32; 갈 3:22). 뿐만 아니라 성경이 세상이라 표현할 때 이는 사실상 세상 전체가 악 속에 처하고 있으며(요일 5:19), 사탄을 그 왕으로 삼아 그 밑에 있으며(요일 2:16),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약 4:4)이라 말함으로써, 세상과 죄악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그런데 인간과 세상이 처하고 있는 이와 같은 끔직한 상태는 어디서 온 것인가? 이미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눈치를 챘겠지만 그 기원은 원죄(Original Sin)로부터이다. 이와 관련하여 몇몇 다른 견해가 있었다. (1)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펠라기우스(Pelagius)로 모든 사람은 아담과 같이 무죄의 상태로 출생하지만, 각자 죄악 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이들의 나쁜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타락하게 된다고 보아 원죄와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가 오로지 바깥으로부터 왔다는 주장은 반성경적이다. 비록 환경이 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모방이 죄의 전파의 수단이 된다고 볼지라도 죄가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기원하며 또한 이러한 죄가 절대적인 보편성이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고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semi-Pelagianism)들은 위의 내용을 완화하여 도덕적 부패성과 죄의 보편성도 인정하지만, 도덕적인 부패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사람이 성장하면서 자유의지로 욕구(욕심)를 취하여 죄악 된 행위로 전환시킬 때 비로소 도덕적 부패성이 죄와 죄책과 유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에 따르면 사람의 의지가 욕구와 관계없이 중립적이며, 스스로 자유롭게 악한 욕구를 좇아 선택을 하게 될 때 죄책이 인정된다고 보게 되는데, 이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도덕적 부패성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의 이성과 의지마저 그 욕구를 좇아 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죄의 기원과 본질에 관하여 성경과 충돌하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변형된 반(半)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이들 견해가 도덕적 부패성에 근거한 모든 사람의 양심에 대한 확실한 도덕적 현실을 부당하게 처리함은 물론, 인류의 절대적인 보편적 죄악성이 어떻게 인간 의지의 결정들에서 수억 번씩 계속해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어 이들 견해는 사실상 설득력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더 나아가 불교의 영향아래 개인의 업보(業報)를 말하면서 보편적인 죄악성의 기원을 각 개인의 개별적인 타락에 찾고, 이를 그저 개인의 운명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이론 역시 이 땅에서 운 좋은 삶을 사는 자들은 보상의 법에 호소할 수 있고, 그리하여 자기들의 덕성을 자랑할 수 있으며, 또한 불행한 삶을 사는 자들-업보로 인하여-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내려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공상이나 상상으로 만족하지 않고, 양심에 확고히 세워져 있는 사실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높이 기린다. 따라서 성경은 불교와 펠라기우스주의의 개인주의적인 주장 대신, 인류의 보편적 죄악성에 대한 유기적(有機的)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인류는 하나의 연합체(a unity)요, 여러 지체가 있는 한 몸이요, 여러 가지가 있는 한 나무요, 여러 시민이 있는 한 왕국이다. 인류는 한 혈통에서 나왔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하나다. 인류는 본성적인 통일성을 근거로 하나의 하나님의 법아래, 행위 언약의 법아래 있기 때문에 법적 윤리적으로 하나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그 타락에 있어서도 하나임을 연역(演繹)해 낸다. 그리고 죄악 역시 보편성을 다룬다. 따라서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면,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하나님의 법적인 선고를 통해 자유와 의롭다 함을 은혜로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하여 죄가 강력하고 힘이 있으나, 은혜가 그 풍성함에 있어서 그보다 훨씬 더 우월한데, 기독교신학은 이러한 사상을 원죄론(原罪論) 속에서 다루어 왔다.

이 원죄론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거나 부정하거나 조롱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가르침이 멈추어 서지는 않고 또한 그 사실이 폐기되지도 않는다.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있으며, 도덕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지니며, 항상 썩어짐과 사망에 종노릇한다는 사실은 세계 역사 전체가 증명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원죄는 첫째로 원시의 죄책(original guilty)의 사실이 포함되며, 둘째로 원죄에는 원시의 오염(original pollution)이 포함된다. 물론 원죄가 어렵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의 법에 근거한다. 말하자면 상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공동체와 연대성이 드러난다. 다만 이러한 공동체와 연대성이 어디서 끝나고, 개인의 독립성과 개인의 책임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우리로서는 그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작은 공동체이건 큰 공동체이건 연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첫 사람은 옛 인류의 머리요, 둘째 사람은 새 인류의 머리이시다. 첫 사람은 세상에서 죄와 사망의 기원이요, 둘째 사람은 의와 생명의 근원이요 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동일한 법이 첫 사람 안에서 우리를 정죄(定罪)하고 또한 둘째 사람 안에서 우리를 사(赦, 용서)하는 것이다. 만일 애초부터 우리가 아담의 정죄를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없었다면, 그리스도 안에 은혜로 다시 영접(용서)을 받는 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좀 긴 내용이긴 하지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서 언급한 “죄와 사망”의 논의를 통하여 결코 인간은 자기 스스로 어떤 도덕적인 행위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당연히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 사도 역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며, 또한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이며, 이 은혜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및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 42:6)라고 함으로써, “불렀고”, “손을 잡았고”, “보호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Total Depravity)를 확인하고, 죄와 사망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여실히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지는 마치 일반은총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한 것이다. 즉, 이 말씀은 바로 보편적인 속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시고 부르신 자에게만 주어지는 “제한적인 속죄”(Limited Atonement)라는 것이다. 또한 39절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신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내게 주신 자 중에”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제한적인 속죄”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신 자는 37절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39절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40절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시므로,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게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40) 라고 확신에 찬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분명해 진 사실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님에 대하여 마치 거울을 보는 듯 하며, 희미한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지만, 이제 주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선물도 주실 것임을 분명히 확신케 한다. 다만 이렇게 주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아래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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