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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12 / 요한복음 6장 41절-44절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3.25|조회수33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12
요한복음 6장 41절-44절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주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은 모두 주님께로 올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들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고 세상 끝 날에 다시 살리실 것이라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교리들을 지난번에 정리를 한 바 있다. 즉, 아담과 하와로 인한 죄는 우리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또한 그의 후손들은 “전적인 부패”로 인하여 그의 양심으로나 도덕,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가 찬 경륜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물론, 그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죄 씻음의 은총을 입어,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자가 되게 하사 끝까지 구원의 보증을 주님께서 하시므로, “성도의 영원한 견인(堅忍)”을 확인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무조건적인 선택”, 그리고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제한적인 속죄”로 이어져 있음도 확인하였다.

그런데 여기 유대인들은 주님이 인자(人子)되심을 육신적인 면에서만 바라보았지, 영적인 인자되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수군수군하며, 비난하고 있는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성육신(Incarnation) 하신 일에 관하여, 단지 그들은 육신적인 의미에서만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단어가 앞에서(6:27) 주님께서 말씀하신 “인자”(人子,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자의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포함하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즉, 완전한 사람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는 말이 바로 인자인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주님을 사람의 아들로 인정하지만, 하늘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심은 인정하지 않는다. 자,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자 칼빈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그의 “기독교강요”를 중심으로 잠시 살피기로 하자. 칼빈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 되셔야 할 이유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2.12.1-3).

첫째, 참 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깊고 먼 거리를 연결할 수 있다(2.12.1). 우리의 중보자가 될 분이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인 것이 우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끼인 구름과 같이,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천국에서 완전히 격리해 버렸기 때문에(사 59:2),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면 평화를 회복할 중재자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올라갈 힘이 없으므로 숭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시지 않았다면 사태는 확실히 절망적일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며(사 7:14; 마 1:23),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人性)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성장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불결과 하나님의 완전한 순결 사이에는 그만큼 심대한 부조화(不調和)가 있다.

둘째, 중보자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셔야 한다(2.12.2).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가 되시지 않는다면, 또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것을 취해서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본질상 그에게 속한 은총을 우리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면, 누가 중보자의 그 임무를 다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보증을 신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실 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것이 필수적이다. 그의 임무는 죽음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생명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임무는 죄를 정복하는 것이다. 의(義) 자체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셋째, 참 하나님시며 참사람이신 분만이 우리 대신에 복종 할 수 있다(2.12.3). 우리 주께서는 참사람으로 나타나시며 아담의 몸과 이름을 취하셔서 아담 대신에 아버지께 복종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로 이행하는 값으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시며,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받았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만으로서는 죽음을 느낄 수 없으며, 사람만으로서는 죽음을 정복할 수 없으므로, 인성과 신성을 결합하셔서 죄를 대속하는 데는 약한 인성을 죽음에 내어 주고, 다른 본성의 권능으로 죽음과 싸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박탈하는 자들은 그의 숭엄성과 영광을 감축하거나, 그의 인애를 희미하게 만든다. 우리와 그리스도가 본성이 같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한다는 보증이며,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가 죽음과 죄를 정복하셔서 그 승리와 개선(凱旋)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나아가 이렇게 중보자의 두 본성(신성과 인성)은 어떻게 한 위격(位格, person)을 이루는가? 칼빈은 여기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하여 “이중성과 통일성”, 그리고 “신성과 인성의 상호관계”를 언급함으로써 이 문제를 설명한다(2.14.1-3). 먼저 이중성과 통일성인데(2.14.1), 칼빈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발언의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 말씀이 혼합되어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발언의 말씀이 그 계실 성전으로서 처녀의 태중을 택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다. 여기는 본질의 혼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위격의 통일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성은 그의 인성의 결합‧통일되어 두 본성은 각각 그 특이성에 손상을 받지 않은 채 결합하여 한 그리스도를 이루었다고 칼빈은 말한다.

사람에게 신체가 영혼이 아니듯 영혼은 또한 신체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요소가 결합하여 인격을 이루며, 이 인격의 기반으로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질이 있어서 한 인격을 이루는 것처럼, 성경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어떤 때에는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만 말해야 하는 일을, 또 어떤 때에는 그의 신성에만 속하는 일을, 또 어떤 때에는 양성에 속하고 어느 한쪽에만은 적합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 돌린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이 양성의 통일을 열심히 주장해서 드디어 서로 교환하는 때도 있다. 이런 표현법을 고대 저술가들은 “속성(屬性)의 상통”(communicatio idiomatum)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상호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2.14.2). 칼빈은 그리스도의 속성 중에는 사람에게 전연 이질적인 것으로,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다”고 하신 말씀(요 8:58)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아가 주께서는 창세전에 아버지 앞에서 영광을 가졌다고 하시며(요 17:5),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신다고 하신 것(요 5:17)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신성에만 속하는 것이 있다. 이에 반하여 그는 “아버지의 종”이라고 하며(사 42:1),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5:52),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며”(요 8:50) 등등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관계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으며”(행 20:28),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전 2:8/ 의역) 하는 말씀들은 속성의 상통을 말하고 있다. 요한 사도 역시 “생명의 말씀을 손으로 만졌다”고 한다(요일 1:1/ 의역). 물론 하나님은 피가 없으며, 수난 받지 않으며,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그가 인간성으로서 하신 일을 그의 신성에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하여 중보자의 위격의 통일성을 말한다(2.14.3).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서 권능을 받았으니 죄를 사하며(요 1:29), 원하는 사람을 살리며, 의와 성결과 구원을 주실 수 있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임명되어 아버지와 같이 공경을 받게 되셨다(요 5:21-23). 끝으로 그를 “세상의 빛”이요(요 9:5, 8:12), “선한 목자”요, “유일한 문”이며(요 10:11, 9), “참 포도나무”라고 한다(요 15:1). 하나님의 아들은 이러한 특권을 받고서 육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양성을 일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 되심에 근거하여, 중보자의 직책에 해당하는 일들은 신성이나 인성에 대해서만 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성과 인성의 통일은 중보자의 위격의 통일성을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상의 칼빈의 논의를 정리하면,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시다. 그리고 언약의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왜 그리스도는 신성은 물론 인성도 가지셔야 하는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참 사람 되심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참인간으로서의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당하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참 하나님 되심은 십자의 고통과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최후의 심판자로 오실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각각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양성의 통일을 통하여 온전한 구원과 심판주(審判主) 되신 것이며, 지면관계상 다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그의 삼중직분(왕, 선지자, 제사장직분)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잠시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본성, 즉 인성과 신성에 관하여 살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두 가지 속성을 지니신 분이 주님이심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심에, 그 중심에 “인자”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ὁ καταβὰς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이라고 하자 수군거리며(Ἐγόγγυζον), 4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느냐”라며 “요셉의 아들”(ὁ υἱὸς Ἰωσήφ)이라는 인성만 보았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이 믿음은 우리가 바로 여기 유대인들과 달리 “인자”의 의미를 바로 알 때 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이 믿음 없는 유대인들에게 들어라 하시듯, 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ἑλκύσῃ)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유대인이건 이방이건, 상관없이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부활의 소망, 성도의 영원한 견인이 있음을 또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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