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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21(마지막)/ 요한복음 6장 67절-71절 너희도 가려느냐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03|조회수31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21(마지막)
요한복음 6장 67절-71절
너희도 가려느냐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5000명(전체로 보면 약 2만명)에게 먹이고도 12바구니가 남은 이적을 베푸신 예수님, 이런 광경을 목격한 무리들은 구름떼와 같이 몰려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을 다하여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찾아다니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하는 말,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6:25) 하였던 자들, 그러나 차츰차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주님의 주님 되심”을 알지 못한 채,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삼으려는 욕망만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은 모를 리 있겠는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5),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6:58),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이런 말씀 앞에 그들은 “이 말씀이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60)라고 수군거릴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 둘 주님 곁을 떠나갔다(6:66).

이제 주님은 67절에 보는 바와 같이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Μὴ καὶ ὑμεῖς θέλετε ὑπάγειν ?)라고 질문을 하신다. 사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너희도 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라는 말이다. 이 말씀 속에는 열 두 제자들은 “아닙니다. 주님, 절대 아닙니다”라는 답변을 강하게 기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은 “너희도 가려느냐”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이 말씀은 수십 세기를 거쳐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의 마음속에 고동쳐 왔다.

그런데 주님의 기대는 베드로를 통해서 드러난다. 68절에 보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한다. 물론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을 모를 리 없겠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흐뭇해 하셨으리라. 사실 베드로는 학문 없는 범인이었다(행 4:13). 그러나 물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달란트이지만, 그는 영적인 진리를 깨닫는 데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자, 여기 베드로의 답변을 좀 살펴보자. 그는 주님을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ῥήματα ζωῆς αἰωνίου ἔχεις)이라 한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오니’(ἔχεις)”라고 읽을 수 있다. 즉,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들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라는 답변이다.

특히 베드로의 이와 같은 고백 안에는 69절에 보는 바와 같이, 영생의 말씀은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자’(ὁ Ἅγιος τοῦ Θεοῦ), 주님만이 그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믿고 알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메시아로 거룩하게 구별되어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확신을 여기 담고 있다(막 1:24; 눅 4:34; 사 43:14 참조).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믿고 알았사옵나이다”(πεπιστεύκαμεν καὶ ἐγνώκαμεν)라고 하는 원어의 표현은 현재완료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믿고 안 행위의 결과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이심을 이미 믿었고 알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는 대답인 것이다. 다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믿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한 순서를 논한다면, 우리는 Augustinus와 같이 “credo ut intelligam”이라고 답변하고 싶다.

자,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그동안 제자들, 그 중에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이렇게 “주님의 주님 되심”을 확신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70절에서 주님께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신다. 아직 여기까지는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답변도 잘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어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ἐξ ὑμῶν εἷς διάβολός ἐστιν)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요한은 이에 덧붙여 71절에서 주님을 팔 자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주님 이외에 제자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우리가 잠시 상상을 해 본다면, “헉!” “주님, 내니이까?”, “주님, 내니이까?”, “주여 나는 아니지요?”(Μήτι ἐγώ εἰμι, Κύριε ?)라고 앞 다퉈 말하지 않았을까?(마 26:22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제 요한복음 6장을 접으려 한다. 우리가 6장을 상고해 본 것은 이 속에 소위 우리가 말하는 신학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살폈다. 마지막으로 71절을 끝내면서, 믿음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말씀과 같이, 오늘 제목으로 삼은 주님의 말씀, “너희도 가려느냐”는 물음에 답변을 해야 한다.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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