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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노트

[구모영 묵상노트] 용서와 사랑의 편지 빌레몬서(2) 빌레몬서 1장 1절-3절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05|조회수35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용서와 사랑의 편지 빌레몬서(2)
빌레몬서 1장 1절-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몬 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몬 1: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몬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레몬서의 1절부터 3절까지는 당시 편지 형식에 따를 때 편지를 보낸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밝히고, 그 다음으로 수신자를 거명하면서 인사말을 전하는 가장 전형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서신 전체를 비교해 보면 빌레몬서의 시작은 다른 서신과 다른 점이 발견되는데, 그 자신을 소개할 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한 점이다. 그의 서신 중 일곱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를 하였으며(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두 서신에서는 아무런 명칭도 사용하지 않았고(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 세 서신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였다(로마서, 빌립보서, 디도서).

그렇다면 왜 바울은 빌레몬서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갇힌 자”로 표현하며 흔히 잘 쓰고 있던 “사도”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인가? 그의 서신 중 일곱 곳에 사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고린도와 디모데 전서와 후서를 나눈다면 총 아홉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이처럼 사도의 직분을 서신 초두(初頭)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사도성에 대한 정당성을 변론할 뿐만 아니라 말씀에 대한 권위도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빌레몬서에서는 자신을 “갇힌 자”(δέσμιος, 죄수)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완전히 내려놓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미 짐작 하듯이 본서가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관대한 용서와 수용을 부탁하는 것이므로, 최대한 빌레몬을 배려하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려는 바울의 마음 자세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바울은 1절에서 이처럼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면서 디모데의 이름도 함께 거명하면서, 디모데를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를 소개할 때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표현도 사용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형제”(ἀδελφὸς)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바울은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디모데는 물론 앞으로 볼 오네시모와 이 서신을 받는 빌레몬 모두가 형제임을 인식케 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곧 7절에서 빌레몬을 향하여 바울은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음도 확인케 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 서신의 수신자 빌레몬에 대하여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한다.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인데, 바울이 그를 이렇게 “동역자”(συνεργῷ)라고 지칭한 것은 최대한 그의 마음을 편하게, 그리고 그의 호의를 기대하면서 정중하게 표현하려는 바울의 신중함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이 편지의 수신인이 1절의 빌레몬만이 아니라 2절에서는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συστρατιώτῃ)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함으로써, 오네시모의 문제를 그의 가족과 그가 속한 교회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여기 자매 압비아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가 빌레몬의 아내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아내가 교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루프레히트(Arthur A.Rupprecht)에 의하면 바울이 빌레몬의 처의 이름도 거명한 것은 “그녀는 그녀의 남편 못지않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노예에 대한 그날그날의 관리책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킵보는 누구일까?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바울은 2절에서 그를 “함께 병사된” 자라고 한다. 물론 모든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군병이라 하지만, 여기 아킵보에게 이와 같은 표현을 한 것은 그가 복음의 직무를 담당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으로, 이 사실은 골로새서 4:17에서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라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혹자는 골로새서 이 구절에 대하여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아킵보가 지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해석도 하지만, 우리는 그가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바울이 디모데를 향하여 직무를 독려하듯이(딤후 4:7 참조) 독려의 의미로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2절 후반 절에 “네 집에 있는 교회”(οἶκόν σου ἐκκλησίᾳ)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곳의 위치가 어딘지 궁금하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확인할 것은 “네 집에”οἶκόν σου라는 단어의 “네”(σου)를 아킵보로 볼 것인가 아니면 빌레몬으로 볼 것인가 논의가 있지만, 이 서신의 주된 수신자가 빌레몬이라는 점에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네”는 바로 빌레몬을 말한다고 봄이 옳을 것 같다.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받았는데, 문제는 그가 거주하는 곳이 골로새인지 아니면 라오디게아인지에 대하여 다툼이 있지만, 우리는 두기고를 바울이 골로새로 보낼 때에 오네시모를 함께 데리고 가면서 그가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한 것으로 보아, 골로새로 이해하고자 한다(골 4:7, 9 참조). 빌레몬은 이곳의 유력자였고 재산가였던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이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집을 예배처소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당 중심의 교회는 거의 3세기에 와서 정착이 되었다. 따라서 초대교회와 바울 시기의 교회란 이처럼 가정교회가 일상적인 형태였던 것이다(롬 16:5; 골 4:15 참조).

바울은 이렇게 이 편지의 발신자, 수신자를 밝힌 후에 이제 문안을 한다. 바울은 대부분의 자신의 서신서에 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적고 있다(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참조). 그리고 나머지 서신서에서는 이 문구를 조금씩 수정하여 사용하고 있다(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그런데 비록 문구는 조금씩 변함이 있을지라도 빠트리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와 평강”(Χάρις καὶ εἰρήνη)이라는 단어이다. 바울서신을 살필 때면 꼭 언급하는 것이지만, 바울이 쓰고 있는 이 두 단어의 순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평강과 은혜”가 아니라 “은혜와 평강”이라는 것이다. 여기 “평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유지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은혜 없이 평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가 보겠지만, 바울은 이 서신의 마지막에 “평강”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를 구하는 기도로 끝을 맺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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