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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용서와 사랑의 편지 빌레몬서(6) 빌레몬서 1장 11절-12절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09|조회수27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용서와 사랑의 편지 빌레몬서(6)
빌레몬서 1장 11절-12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몬 1: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몬 1:12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바울은 8절부터 이제 그가 본래 말하고자 한 것으로 시작을 하는데, 10절에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처음으로 오네시모의 이름이 거명되었다. 아마 바울이 오네시모를 거명하자, 빌레몬은 온갖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오네시모가 종으로서 일을 하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나쁜 짓을 하고 도망을 가버린 일로 인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어쩌면 집에 있는 다른 종들을 시켜 오네시모를 잡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를 잡지 못한 채,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렇게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은 그는 잠간이나마 멍하니(요즈음 말로 하면 멍 때리는 상태로)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본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앞 10절에서 오네시모를 “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며, 그를 위하여 이렇게 손수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에 많이 당황을 했을 것이다. 또한 더 당황스러운 것은 1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라고 한다.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네시모”라는 말은 “유익한”(εὔχρηστον)이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오네시모는 종으로서 그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고 심지어 주인의 물건을 훔치고 도망을 간 사람이었기에, 그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는 분명 “무익한”(ἄχρηστον) 종이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오네시모를 향하여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라고 하니 대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네시모의 사람 됨됨이가 빌레몬이 수긍할 정도로 바뀌었다면, 그래서 유익한 사람이라면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빌레몬의 입장에서는 바울의 이와 같은 말에 증거라도 보여 달라고 할 것만 같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사람 됨됨이에 대하여 직접적인 설명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하여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할 것 같다. 즉,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나의 아들이라 하였으며, 오네시모를 위하여 자신의 지위나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빌레몬이 받아 줄 것을 요청하였고, 여기 1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이 그를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종결 짓기 위하여 편지와 함께 그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그를 자신의 “심복”(σπλάγχνα)이라고 한 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거듭난 자, 복음을 받고 회심을 한 자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생각은 단지 우리가 그러기를 바란다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끔 예수 믿는 사람을 향하여, 아주 옛날에는 그에 대한 신임도가 높아서 절대로 사람을 속이지도 않는 진실한 사람의 대표자로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 이렇게 말하면 잘난척이나 하고 말이나 많은 실속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가끔은 예수 믿는 사람을 너무 유약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비록 세태가 이렇게 평가를 내린다고 할지라도 믿는 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참다운 기독교인은 경건하면서도 동시에 땅 위에서도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중생을 한 사람,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오네시모가 이전에 무익한 자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라고 한 것처럼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클레이가 제임스 데니(James Denney)의 말을 인용한 것과 같이, 기독교라는 것은 악한 자를 선하게 하는 힘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익한 자가 유익한 자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주목을 해야 한다. 기독교가 창조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얼빠지고 무능하고 몽상적이고 막연한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훌륭하게 일할 수 있는 유익하고 사물에 이해력을 지닌 사람들을 세상에 내 놓은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관점에서 오네시모를 보았으며, 이제 그를 그리스도인으로서 빌레몬에게 다시 돌려보내려 한다. 그래서 12절은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라고 말한다. 여기 “돌려보낸다”라는 말은 물론 이전 그가 있었던 곳으로 되돌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바클레이는 “사건을 맡긴다”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오네시모를 보내니, 그에 대한 판단은 빌레몬이 하라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판단을 함에 있어 이미 바울은 여러 차례 빌레몬을 향하여 자신의 입장을 아주 겸양(謙讓)을 다하여 전했던 것을 볼 때, 바울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 빌레몬이 따라 줄 것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12절 끝자락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σπλάγχνα)이라고 말한다. 여기 심복이라는 말에 대하여 영어로 very heart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심장(kardia)이 아니라 소장과 대장과 같은 소화기관(bowels, intestine)을 의미한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통상 이 심복이라는 splanchna는 애정, 친밀감 또는 깊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데 앞의 7절에서는 “성도들의 마음”(τὰ σπλάγχνα τῶν ἁγίων)으로 번역되어 있다(1:7, 20, 빌 2:1; 골 3:12 참조). 어쨌든 이처럼 바울이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이라 한 것은 그 누구보다도 애정을 가지고 친밀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과연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있는 빌레몬이 바울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까? 바울은 이처럼 한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까지 혼신을 다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오네시모에 대한 바울의 마음을 13절 이하에서 더 확인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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