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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용서와 사랑의 편지 빌레몬서(8) 빌레몬서 1장 16절-17절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11|조회수34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용서와 사랑의 편지 빌레몬서(8)
빌레몬서 1장 16절-17절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몬 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몬 1: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바울은 바로 앞 절에서 오네시모를 말하면서 그가 잠시 주인인 빌레몬을 떠난 것은 빌레몬으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려 함이라 하였다. 이 말 속에는 바울의 오네시모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포함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된 것도 사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 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오네시모는 범죄자로 도망을 갔지만, 그가 자신의 실수를 뉘우치고 무익한 자가 아니라 유익한 자로, 또한 빌레몬에게 단순히 주종의 관계를 넘어 영원히 함께 둘 수 있을 만큼 그는 확실히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16절에서 이후로는 그를 종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οὐκέτι ὡς δοῦλον, no longer as a slave),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ἀδελφὸν ἀγαπητόν) 둘 자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바울의 생각이다. 그리고 바울 스스로 오네시모를 형제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하여 “갇힌 중에 낳은 나의 아들”, “무익한 자에서 유익한 자”, “내 심복”, “네 대신에 나를 섬길 자”라고 하더니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이제는 “형제로 둘 자”라고 한다. 바울은 이와 같은 말을 한 후에, 16절 후반 절에서는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라고 한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에 다소 쉽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현대인의 성경은 “이제부터는 그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의 사랑하는 형제로 대해주시오. 나에게 이처럼 소중한 그는 종으로서, 주님을 믿는 형제로서 그대에게 더욱더 소중할 것입니다”라고 풀어 쓰고 있다. 어쨌든 바울의 의도는 바울이 빌레몬을 형제로 부르는 것과 같이 자신이 오네시모를 형제라 부르기에(골 4:9 참조) 그렇다면 빌레몬도 동일하게 그를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말을 한 후에 17절에서는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κοινωνόν)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라고 함으로써, 위의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키고 나아가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빌레몬이 바울을 동역자로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오네시모 역시 바울의 동역자이기 때문에 마치 빌레몬이 자신을 대하듯이 오네시모를 대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바울의 이 서신을 읽어가면서 얼마나 집요하게, 그리고 얼마나 놀랍게도 오네시모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빌레몬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확인하고도 남을 듯하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바울의 심정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더 정리를 해야 할 것은 과거의 잘 못을 범한 자에 대한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 말은 용서를 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그 용서는 말로 그치고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이전의 과오를 되씹고 있는 것을 보는 예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인은 언제나 과오를 범한 사람을 다시금 영접해야 한다. 이는 마치 바울이 빌레몬을 향하여 간절히 바랐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사실 우리 자신은 그를 용서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 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실패한 밑바닥에 있는 바로 우리를 믿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위의 구절에 대하여 때로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줄 것으로 요청한 것이라는 설명을 듣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은 구절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배우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서신서는 너무 일반적인 시대적 변화를 요구하는 바울의 주장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는 극히 개인적인 요청이다. 따라서 바울의 본래의 마음은 노예제도는 폐지되고 노예는 해방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생각하면서 종은 종으로서, 상관은 상관으로서의 할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엡 6:5-9 참조) 위와 같은 견해는 동의하기 어렵다. 또한 만약 바울이 이처럼 노예, 종의 해방을 주장했다고 한다면 아마 그가 전하는 복음의 길은 더 나아가지 못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대적인 상황을 거스르는 일이며, 결국 폭동을 조장하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독교가 결국은 혁명적이고 망국적인 종교로 낙인찍히게 되었을 것이며, 이렇게 되면 오히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때는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 기독교의 신앙이 누룩이 되어 사회 전반으로 흡수가 될 때에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이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생각은 분명했을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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