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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2) 빌립보서 서론(1:1-2)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16|조회수36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2)
빌립보서 서론(1:1-2)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 빌 1:1 이 편지는 바울사도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과 감독 및 집사들에게 보낸 것으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통상적인 편지의 양식에 따라 발신자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신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δοῦλοι, 복수형인 것은 디모데와 함께 언급하였기 때문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이란 ‘자유자’와 반대용어로 주인의 일을 하고 있는 전적인 부자유자, 즉 노예(Slave)를 말합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이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되는 일고의 생명보존의 가치가 없는 마치 재산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종이라 표현한 것은, 바울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한 일꾼임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종인가? 아니면 자유자인가? 자신의 사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빌 1:1 이 편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흔히 말하는 세상의 어떤 단체에 보낸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여 있는 거룩한 공동체(Ecclesia)에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공동체, 즉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무형의 교회와 유형의 교회로 나눌 수 있는데,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을 무형의 교회라 한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가시적인 건물이 아닌 공동체의 모임을 유형의 교회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성령이 내주하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특히 바울이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빌립보 교회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들어가게 됨을 묘사한 것으로, 이는 곧 바로 이어지는 성도로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교회 내에 있는 감독과 집사를 먼저 표현하지 않고 “성도(ἁγίοις)와 감독(ἐπισκόποις) 및 집사”(διακόνοις)라고 쓴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에 세운 직분은 결코 계급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봉사를 위한 헌신의 사명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칫 잘못하는 경우 장로, 집사, 그리고 평신도로 나누는 계급주의가 들어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바울사도가 이러한 점을 생각했더라면 성도들보다 감독과 집사를 먼저 언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독과 집사도 역시 성도라는 점에서 “모든 성도”(Πᾶσιν τοῖς ἁγίοις)부터 먼저 언급한 것은 깊이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聖徒, saints)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그에게 속하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 가고 있는 기독신자들을 말합니다. ‘감독과 집사’는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교회 내의 직분으로, 감독은 장로직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딛 1:5, 행 20:28). 그리고 ‘집사’는 사도행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 내의 재정을 담당하며 구제하는 일을 맡은 직분자를 말하지만, 여기 문자적으로는 “섬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3] 빌 1:2 문안 인사에 있어 “평강과 은혜”(平康과 恩惠)로 표현하지 않고 “은혜와 평강”(Χάρις καὶ εἰρήνη)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순서를 잘 음미해 보십시오. 결코 우리의 평강(안)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삶이란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며, 그래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인간의 삶으로 표현하지 않던가요?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καὶ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얻게 된 구원도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강(안)을 누리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또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4] 빌 1:1-2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은, 다른 서신서(예, 로마서)에는 바울사도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고 하여 자신의 사도성(司徒性)을 강조하고 있는데, 빌립보서의 경우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 이는 빌립보교회에서는 바울사도를 사도로 보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거나, 또는 이 편지가 개인 서신적인 의미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표현을 하지 않아 사도라는 말을 뺏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와 바울사도의 관계를 본다면 전자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 직분을 맡긴 12명의 제자를 말하는데, 이 12명의 숫자에는 바울사도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사도의 사도성에 그의 선교활동 중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자신이 사도행전 9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주님께서 사도의 직분을 맡기셨다(행 9:6)는 것을 근거로 사도성을 변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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