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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4)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18|조회수37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4)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7-8)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1] 빌 1:7-8 그렇다면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앞 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빌립보교회의 복음을 위한 착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복음에 대한 헌신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함께 했다”(ἔν τε τοῖς δεσμοῖς μου, καὶ ἐν τῇ ἀπολογίᾳ καὶ βεβαιώσει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고 한 것입니다. 여기 “나의 매임과 …함께 했다”는 말은 사실 “체인으로 둘이 묶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옥중생활을 염려하여 빌립보교회의 교인인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바울사도를 수종 들기 위하여 보낸 에바브로디도가 그만 병에 걸렸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은 혹시 에바브로디도로 인하여 바울사도에게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염려까지 하였습니다(2:27). 얼마나 바울사도에게 감사한 일인가요? 이처럼 빌립보교회와 같이 우리의 봉사와 헌신이 우리의 감정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복음을 위하여 같이 헌신하고 수고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둘째, 빌립보교회는 바울사도의 “마음에 있는(ἐν τῇ καρδί ὑμᾶς)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몸은 서로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한가지인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말하는데, 바로 바울과 빌립보교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를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세상적인 사랑으로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心腸”(ἐν σπλάγχνοι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으로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장(σπλάγχνοις)이란 달리 말하면 ‘愛情’(affection)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애정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바로 그의 ‘十字架’ 지심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이러한 마음으로 그들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연애를 해본 분은 잘 알 것입니다. 너무나 청춘남녀가 서로 사랑하다보면 잠시도 떨어져 있는 것이 마치 하루가 천년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방 만나고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사이에 그리워 전화를 하지 않는가요? 이 모습이 바로 바울과 빌립보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와 여러분은 이러한 관계에 있는가요? 그리고 이와 같은 사모하는 마음에 대하여 “하나님이 증인”(μάρτυς γάρ μου ὁ Θεός) 이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셋째, 빌립보교회의 헌신과 수고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ἡμέρα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섬김에 기쁨과 소망을 있었고, 바울사도 역시 감사가 절로 나온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이라고 할 때는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날”은 재림주로 오실 그날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자였던 손양원목사님이 자주 불렀던 찬송시 중에 “고대가”(苦待歌)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5.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준비 다 해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6. 천년을 하루 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로마의 압제시대에 성도들은 지하묘지인 카타콤(Catacomb)에 숨어서 신앙의 정절을 지켰으며, 그들은 성도들끼리 “주님 다시 오십니다”(Maranata)라고 말했습니다.

[2] 7절의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συνκοινωνούς μου τῆς χάριτος πάντας ὑμᾶς ὄντας.) 바울의 이 말에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바울의 사역은 곧 빌립보 교회의 사역이었습니다. 우리는 선교와 관련하여 비록 보내는 사역자, 도움을 주는 사역자이긴 하지만 바울과 같은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정한 사역자였는지 반성하게 합니다. 각 교회마다 선교 후원자들을 지정하긴 하지만, 어쩌면 숫자만 널렸지 현실성 있는 지원을 하지 못하는 것을 왕왕 봅니다. 어쩌면 참으로 죄송한 말이지만, “생색(?)만 내는” 선교 동역 교회가 아닌지 반성을 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사도와 빌립보 교회의 관계처럼 그렇게 내실 있는 동역을 기대합니다. 기도의 동역자, 물질 후원의 동역자, 이름만 있는 동역자가 아닌 실질적이며 내실을 다지는 동역자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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