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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5)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19|조회수34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1:9-11)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1] 빌 1:9 바울사도는 감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또한 빌립보교회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의 기도는 “내가 기도하노라”(προσεύχομαι)라고 시작을 하면서 그 첫째의 기원을 9절에서 밝힙니다.

바울의 첫 번째 기원은 빌립보교회의 사랑이 한낮 일순간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왜 이와 같은 사랑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앎, 즉 ‘지식과 총명’을 더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즉,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ἵνα ἡ ἀγάπη ὑμῶν, ἔτι μᾶλλον καὶ μᾶλλον περισσεύῃ ἐν ἐπιγνώσει καὶ πάσῃ αἰσθήσει)라고 기도합니다. 사랑은 다소 감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거저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방을 더욱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잘 알아감으로써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확대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고 했던 것입니다.

[2] 빌 1:10 10절은 9절의 첫째 기원을 통하여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시고 지식과 모든 총명”이 수반됨으로 인하여 얻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 풍성케 됨”으로써, 둘째 기원으로 이어지길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10절의 기원은 9절에 이어지는 목적이라 볼 수 있는데, 우리 성경은 10절을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도록”(εἰς τὸ δοκιμάζειν ὑμᾶς τὰ διαφέροντα, ἵνα ἦτε εἰλικρινεῖς καὶ ἀπρόσκοποι εἰς ἡμέραν Χριστοῦ) 이라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을 좀 더 문언대로 번역하면 “너희가 여러 다른 것들(불순물)로부터 지극히 선한 것을(τὰ διαφέροντα) 분별하여(τὸ δοκιμάζειν, 좋다고 인정하여, 승인하여) 순전하고 허물없이(εἰλικρινεῖς καὶ ἀπρόσκοποι)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도록”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분별하다”는 단어는 본래 당시 귀금속의 순수성과 동전의 중량의 명확성을 확인하여 최종적인 승인을 하는 행위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다른 교회들보다는 이단사설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당시 소아시아지방의 교회나 고린도교회에서는 너무나 많은 이단사설에 노출됨으로, 복음이 너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예로 “영지주의”(靈知主義), 그리고 유대의 율법주의(律法主義)가 가장 대표적이었습니다. 물론 영지주의는 3세기 들어와 완전히 정착된 이론이기는 하지만 이미 이 당시부터 사실상 교회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순수성과 진리에 바로서서 교회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지극히 선한 복음과 이단사설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순전하고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와 관련지어 좀 더 부연하면, 현대의 신학은 기복주의(祈福主義)와 은사주의(恩賜主義)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건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오직성경’, ‘오직은혜’, 그리고 ‘오직믿음’을 개혁주의의 신학원리로 삼았던 것이 오늘날 많이 퇴색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복달라고 비는 종교가 되어,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 받는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물질의 복이 없는 자는 예수를 잘못 믿은 것입니까? 그리고 은사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사 중 방언만이 무조건 좋은 것이며, 또한 구원받은 표지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8 이하에서 다양한 은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일만 말보다 깨달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났다고 합니다(고전 14:19). 또한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고전 14:20).

[3] 빌 1:11 셋째, 바울은 빌립보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에 열매”(καρπὸν δικαιοσύνης)로 가득 채우길(πεπληρωμένοι)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의 열매”란 “의로움이 만들어내는 열매”로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 그 종류는 여러 가지로 나열할 수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지적은 성령의 9가지 열매일 것입니다. 즉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런데 이러한 열매는 자신의 능력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1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맺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인하여 빌립보교회가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εἰς δόξαν καὶ ἔπαινον Θεοῦ) 기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빌립보 교회를 향한 9절에서 11절까지의 기도는 결국 여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궁극적인 결론이며 그의 기도의 종착점일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내가 칭찬을 받고 내가 남에게 존경을 받기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과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존귀케 하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고전 15:10)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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