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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6)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20|조회수36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6)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12-18)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 빌 1: 12-14 바울사도는 분명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황제의 시위대 감옥에 감금되었거나 아니면 가택연금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우리는 바울이 이곳에 거주한 기간이 2년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행 28:30) 가택연금으로 생각을 합니다. 특히 여기 “시위대 안과 그 밖의”(τῷ πραιτωρίῳ, καὶ τοῖς λοιποῖς)라는 말이 장소적인 “안과 밖”(in and out)의 의미가 아니라 시위대(군인)라는 조직멤버와 그렇지 않은 나머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더욱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바울이 이처럼 연금되었기 때문에, 사탄마귀나 바울사도의 복음전파를 방해하던 자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매임은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προκοπὴν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3절에서 바울은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한 바와 같이, 그가 복음을 전하다 로마에까지 왔다는 소문이 전파되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소문으로 인하여 이곳에서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특히 바울은 스스로 말하듯이 자신이 이렇게 매임을 당함으로 인하여 그를 감시하는 군인들을 항상 만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 이외의(τοῖς λοιποῖς, 그 밖의) 로마의 시민들, 심지어 귀족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가이사의 집 사람 몇 명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4:22) 말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감금은 바울이 로마의 군인들과 귀족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복음을 전한 수 있었다는 점도 있지만, 또 하나는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형제 중 다수”(πλείονας τῶν ἀδελφῶν)가 바울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담력을 얻고 그들 역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이렇게 로마로까지 와서 연금 상태에 있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어쩌면 바울이 이와 같은 상태에서도 그 입에서는 항상 복음을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형제들이 바울로 말미암아 오히려 복음을 위한 일에 담력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결코 좌절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설령 핍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위한 의로운 일에 하나님은 결코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임을 확신케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 오히려 복음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진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갇힘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와 절망처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도 역전시키시는 분이심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아닐까요?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逆戰의 名手)이십니다.”

[2] 빌 1:15-18 바울사도가 로마에서 이처럼 감금 상태에 있게 되었을 때, 앞서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ἐν Κυρίῳ πεποιθότας τοῖς δεσμοῖς μου, περισσοτέρως τολμᾶν ἀφόβως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ῦ〉 λαλεῖν) 되었습니다. 다만 복음을 전하는 동기는 다양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는 바와 같이 어떤 이들은 바울사도를 “투기와 분쟁으로”(διὰ φθόνον καὶ ἔριν) 전했습니다. 즉, 바울을 시기하며 질투하던 자들이 바울사도를 대신하여 자신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바울사도가 감금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그 일을 대신하지 않으면 어찌 복음이 편만해 질 수 있겠느냐며 “선한 마음으로”(δι’ εὐδοκίαν)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ἀληθείᾳ) “사랑으로”(ἐξ ἀγάπης)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의 일을 들어내면서 괜히 바울을 깎아 내리려고 하는 사람들, 이들은 “겉치레로”(προφάσει, 구실, 핑계로) 바울을 은근히 “괴롭게 하려는”(θλῖψιν ἐγείρειν)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모양으로 하든지 자신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 전파한다면”(Χριστὸν καταγγέλλουσιν) 자신은 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이단사설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어떤 방법으로 복음이 전하여졌건 간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Χριστὸς καταγγέλλεται. καὶ ἐν τούτῳ χαίρω. ἀλλὰ, καὶ χαρήσομαι)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을 위한 그의 열정과 신실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전파를 함에 있어 경쟁을 하는 것은 좋으나, 이처럼 비방을 하면서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은 못됩니다.

초창기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외국의 선교사들은 서로 경쟁을 막기 위하여 지역을 나누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에 있어 각 지역의 개 교회들이 서로 투기와 비방을 일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교단이 다르다는 이유로, 크고 작다는 것 때문에 다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사도 당시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우리 상황을 본다면 바울 당시와는 다른 점들이 많습니다. 말하자면 복음 외적인 것으로 인하여 복음을 받아야 할 자들의 비방이 있을 수 있고, 이로 인하여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기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찌되었건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사도는 복음에만 온전히 헌신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볼 수 있습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빌 1:20) 간절히 바라는 바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닮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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