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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7)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21|조회수37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7)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1:19-26)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함이라


[1] 빌 1:19, 25 바울사도의 삶의 목표는 복음전도의 사명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οἶδα γὰρ ὅτι τοῦτό μοι ἀποβήσεται εἰς σωτηρίαν διὰ τῆς ὑμῶν δεήσεως καὶ ἐπιχορηγίας τοῦ Πνεύματο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구원”(σωτηρίαν)이란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금되었지만, 석방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의 육적인 구원과 또 다른 하나는 근본적인 천국시민으로서의 성도의 영적인 구원입니다. 물론 바울사도의 경우 다시 감옥에서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구원의 의미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Καὶ τοῦτο πεποιθὼς, οἶδα ὅτι μενῶ καὶ παραμενῶ πᾶσιν ὑμῖν εἰς τὴν ὑμῶν προκοπὴν καὶ χαρὰν τῆς πίστεως)라고 한 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믿음의 진보를 가지게 할 수 있음과 앞으로 남은 사역을 더욱 박차를 가하여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바울사도는 육적으로는 감옥에서 나오게 되는 경우 더욱 복음전파를 할 수 있다는 면에서 기대를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감옥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천국에 이르는 경우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2] 빌 1:20-21 그렇지만, 바울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처하건, 20절에서 보듯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ὡς πάντοτε καὶ νῦν, μεγαλυνθήσεται Χριστὸς ἐν τῷ σώματί μου, εἴτε διὰ ζωῆς εἴτε διὰ θανάτου)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더욱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즉, 달리 표현하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변함이 없다”(κατὰ τὴν ἀποκαραδοκίαν καὶ ἐλπίδα μου ὅτι ἐν οὐδενὶ αἰσχυνθήσομαι, ἀλλ’ ἐν πάσῃ παρρησίᾳ)는 것입니다. 따라서 21절은 그의 굳은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Ἐμοὶ γὰρ τὸ ζῆν Χριστὸς, καὶ τὸ ἀποθανεῖν κέρδος)라고 합니다.

[3] 빌 1:22-26 우리는 21절까지만 보면 바울의 굳은 믿음의 본을 보면서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에서 바울은 갑자기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것이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εἰ δὲ τὸ ζῆν ἐν σαρκί, τοῦτό μοι καρπὸς ἔργου)라고 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할지 알지 못하노라”(καὶ τί αἱρήσομαι? οὐ γνωρίζω!)라고 합니다. 갑자기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을 접하면서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와 같은 모습은 여기가 유일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롬 7:21-25을 살피면 자기 속에 두 법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법이 자기 속에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7:24)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23절과 같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ἀναλῦσαι καὶ σὺν Χριστῷ εἶναι) 이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렇게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끼었다”(συνέχομαι δὲ ἐκ τῶν δύο)면서 자신이 “육신으로 있는 것이”(ἐπιμένειν ‹ἐν› σαρκὶ) 교회를 위하여 더 유익이 되리라(ἀναγκαιότερον δι’ ὑμᾶς,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살아서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확신시키고(πεποιθὼς)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εἰς τὴν ὑμῶν προκοπὴν καὶ χαρὰν τῆς πίστεως) 함께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계속 함께 하고 싶다”(παραμενῶ)는 것입니다. 나아가 26절에서는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καύχημα ὑμῶν)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함이라”라고 합니다. 즉, “빌립보교회를 시작케 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함께 하고 있을 때 자랑이 될 수 있지 않겠니” 하는 바울의 마음이 읽힙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상과 같은 말 속에 다소 막연하지만, 로마에 연금되어 있는 자신 앞으로 마지막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을 느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연금 상태로부터 풀려나 자유로운 몸으로 다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더 계속적으로 감당하고픈 마음도 읽을 수 있습니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복음자의 생활을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항상 외롭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왜 이 일을 하여야 하나. “남들처럼 더 안락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절망이 밀려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들이 말씀으로 양육한 새 생명들이 여러분 당신으로 인하여 그들의 자랑이 풍성하게 됨”에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특히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희망이며, 자랑이며 나아가 면류관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훗날 천국에 들어 갈 때에 바울사도처럼 이것도, 저것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면서 자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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