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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산상수훈(10) 마태복음 5장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2.03|조회수39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산상수훈(10) 마태복음 5장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


구모영 장로 / 법학박사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우리는 이제 팔복의 마지막인 “의를 위하여 박해(핍박)를 받는 자”가 받는 복에 대하여 살피고자 합니다. 성경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게는 “천국이 저희 것임”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동일하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의미와, 이 때 그들이 누릴 “천국”에 대하여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10절 전반 절에 “의를 위하여 박해(핍박)를 받는 자”(οἱ δεδιωγμένοι ἕνεκεν δικαιοσύνης)라고 할 때 “의”(δικαιοσύνης, dikaiosynēs)란 “하나님의 의”이지만 여기서는 그 “하나님의 의” 되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이를 풀어 쓰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자”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받는 “박해”(δεδιωγμένοι, dediōgmenoi)는 어떤 것일까요? 이런 박해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생을 열거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그런데 우리는 “박해”(핍박)라는 말에 어쩌면 별 감동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마태가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 초대교회의 상황이나 아니면 초기 기독교가 들어왔던 조선시대 말, 그리고 일제 강점기 또는 6.25 사변시의 믿는 자에 대한 심각한 고난과 환란의 때와는 지금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계적으로 보면 북한이나 무슬림에서 보이는 박해는 가끔 우리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보듯이 상상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조건 없이 누리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박해라는 단어가 오히려 생경(生硬)하기까지 하지요. 항간에 코로나와 관련하여 집회금지를 박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꼭 이것을 박해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어쩌면 이 말은 더 이상이 영향력이 없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고 과거와 같은 심각한 박해를 느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믿는 우리들로 인하여 주님께서 오히려 박해(모욕)를 받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가 산상수훈을 계속 읽어 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고통의 연속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이것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로 오롯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육체적인 박해는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상과 사탄마귀는 “왜, 진리의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며 신앙 양심에 무참히 참소(讒訴)하는 소리로, 그리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욕을 얻어먹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10절 후반 절은 이와 같이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게는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 저희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장차 우리가 갈 곳이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이미 천국은 임했기 때문에 천국은 아직과 이미 속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곳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의미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미 5:3에서 살핀 바 있기 때문에 상세한 설명은 그곳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다만 5:3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그에게는 세상이 말하는 복과는 다른 고차원의 행복, 즉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평안의 복을 누리며, 또한 이들에게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했는데, 동일하게 팔복을 마치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게 주어진 복도 바로 이와 같은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후반 절)라고 하시며,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 중반 절)고 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팔복은 매우 역동적인 말씀입니다. 팔복 중 앞의 네 가지 복(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은 다소 소극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기에게 의가 없음을 알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며 탐구하는 신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앞의 처음 네 가지는 죄인이 반성하고, 통회하며,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구원을 받는 계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네 가지 복(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은 이렇게 구원받은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긍휼히 여겨야 하며, 이중적인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단순한(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화평과 평강을 드러내며,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녹록한 것인 아님을 알고 날마다 고통하며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수고로움은 우리에게 예비 된 이미와 아직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천국이 있어, 그 백성이 됨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들” 이겠지요. 오늘 하루도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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