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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노트

[구모영 묵상노트] 산상수훈(22) 마태복음 5장 40절-42절 또 너를 고발하여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2.15|조회수57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산상수훈(22) 마태복음 5장 40절-42절 또 너를 고발하여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한 40절은 송사(訟事)를 통해 속옷(τὸν χιτῶνά/chitōna)을 달라하면 겉옷(τὸ ἱμάτιον/himation)까지 가지게 하라고 하십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극빈자들은 보통 속옷과 겉옷 한 벌씩만 소유하고 있었기에, 겉옷을 훔치는 일은 법적 소송을 일으킬만합니다. 또 유대의 경우 송사를 하더라도 겉옷을 빼앗을 수 없기에(출 22:26-27), 당연히 겉옷은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겉옷은 외투가 될 뿐만 아니라 밤에는 추위를 막아주는 덥고 자는 담요역할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누가 송사를 해,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내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라고 하더라도, 때론 손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양보하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과분한 부담으로 지운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부담을 감내하라는 것이지요.

41절은 “오 리를 가자하면 십 리까지 동행하라.” 당시 로마 군인들은 지역 주민의 노동력이나 가축 또는 재화를 징발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참고. 막 15:21).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지역 주민들이 보이는 경우 들고 있던 창으로 주민의 어깨를 툭 치면서 짐을 가리키면, 일단 주민들은 이 짐을 오 리는 대신 지고 가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억지로”(ἀγγαρεύσε/angareusei)라는 단어는 영어로 to compel(거역 못하는 영향력을 갖다. 억지로 …을 하다)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였으며, 따라서 최소한 오 리는 동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리상으로 볼 때 사실 갈릴리는 이런 상황이 비교적 흔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혹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는 저항하지 말고 도리어 억압자에게 도움을 제공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심지어 주어진 의무인 오 리를 넘어 십 리까지 동행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거니와, 주님은 그 이상의 도리(道理)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 앞에서, 우리는 마치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마지못해 억지로 오 리만 가고 있는 것 아닌지요? 이제 억지가 아니라 십리 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동행하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자신을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42절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구걸하는 사람은 도처에 깔려 있었습니다. 성경은 핍절한 이에게 기부할 것을 가르치면서(신 15:11; 시 112:5, 9; 잠 21:13), 가난한 자를 도운 이들의 필요는 하나님이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신 15:10; 잠 19:17; 22:9; 28:8). 또한 성경의 율법은 고리대금을 금하는 것이나 면제년에 가난한 이의 필요를 외면하지 말고 기꺼이 돈을 빌려 줄 것을 명하는 것(신 15:9) 등은 모두 본문에서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원칙을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요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지 않는 기부의 수준에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눅 6:35), 제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길이기에 얼마나 힘든 길인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때로는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최소한의 권리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라고 주님은 독려하십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바보입니다. 그러나 비록 바보 소리를 듣더라도 좋으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비록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녹록한 것은 아니지만, 힘을 다하여 살아봅시다. 평안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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