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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노트

[구모영 묵상노트] 산상수훈(28) 마태복음 6장 9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2.21|조회수59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산상수훈(28)
마태복음 6장 9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는 바로 앞에서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위의 말씀을 따라 그의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에서 기도의 네 가지 법칙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피면 1) 기도는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깊이 생각하여 경외(敬畏)함으로, 2) 진심으로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3) 자기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며, 4) 확신 있는 소망을 가지고 하라고 했습니다(3.20.4-14).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이하 주기도문)를 살피고자 하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시작으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니다”라고 마치는데, 그 사이에 여섯 가지의 기원이 있으며 이것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습니다. 즉, 주기도문 6장 9절부터 10절까지의 세 기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중심이라면, 11절부터 13절까지의 세 기원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구해야 할 것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도 하나님의 영광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칼빈도 뒤의 세 기원이 우리 자신의 유익과 관계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우리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아 이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한 바 있습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할 때에도 비록 이것이 우리 자신의 유익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면 이 양식도 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3.20.35).

이제부터 우리가 주기도문을 살핌에 있어,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중심으로 개관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칼빈은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경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한 바와 같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안에서 성경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할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Πάτερ ἡμῶν)라고 호칭을 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다른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혜의 자녀로 삼아주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예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요 1:12)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에도 이렇게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 대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을 증명하시듯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요일 3:1)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것만큼 더 확실하게 증거 하시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혹,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들이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잊으며 자기 자녀들을 버린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시 27:10; 사 63:16).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시는 것이 됩니다. 즉,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딤후 2:13)(3.20.36).

이처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것은, 우리를 고무(鼓舞)할 것입니다(3.20.37).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들의 눈물과 신음에 더욱 주목하사 직접 당신에게 호소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우리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분명하게 부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을 볼 때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질만한 존재 가치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는 우리를 향해 아버지로서의 애정만을 품으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자식들인 우리는 당신을 부르며 기도드리는 것이겠지요. 다만, 이 때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 위해, 성령님의 강력한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호칭하는 것은 우리와 교우(敎友)들과의 친교를 확립하게 합니다(3.20.38)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들 사이에 큰 형제애(兄弟愛)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 즉 현재 눈에 보이는 주변 사람들 뿐 아니라,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의 가족 곧 바울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부탁한 사람들(믿음의 가정들)에 대해서(갈 6:10) 특별히 애정을 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하나님이십니다(3.20.40). 본문에 “하늘에 계신”이란 말을 첨부 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특수한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1) 우리 인간은 하늘보다 더 숭고하거나 존엄한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이라는 말로 그의 영광을 표시하게 된 것이며, 2) 그를 부패하게 하거나 변하지 않는 영역으로 높이게 되며, 3)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힘으로 우주 전체를 포용하시며 유지하시며 지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를 넘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만유의 주재이십니다. 그의 존엄 앞에 오늘도 무릎을 꿇고, 또 어린 자녀와 같이 그의 무릎에 앉아 “아빠”하며 아뢸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함께 하는 복된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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