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만 먹고 살 순 없잖아요?”
목사님 한 분이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라 하지만 이슬만 먹고 살 순 없잖아요? 목사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살아 본 적이 있나요?” 라고 물어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그 목사님 안에 믿음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만 무너지지 않으면 아무리 힘든 형편에 처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받고 다시 일어날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무너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더 상심하고 화가 나고 절망합니다.
얼마 전 ‘살만 하니 예수만 바라보라고 한다’ 라는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살만하면 오히려 주님만 바라보게 되지 않습니다.
도무지 살 길이 없어져야 주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만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직 살만한 것입니다.
지금의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게도 앞이 캄캄할 정도로 힘들었던 순간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어디도 저를 받아줄 교회가 없어,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면 목회를 그만두리라’ 결단하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기도만 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난 어느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믿을 수 밖에 없는 이끄심으로 목회를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극심한 가난에 대하여 아주 모르지는 않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목회를 시작하셨을 때는 일제 시대였습니다.
당시 정말 먹을 것이 없는 극한 가난을 겪으셨습니다. 견디다 못해 목회 현장을 떠나 장터에서 빵을 좌판에 내어 놓고 파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께서 “여보, 우리 교회로 돌아갑시다” 하신 말씀에 두말도 않고 좌판을 거두시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신 목회는 6.25 전쟁 때 순교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저희 부친의 목회도 고생스러우셨습니다.
어머님은 제가 신학생 때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가난하게 사는 법도 부유하게 사는 법도 다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12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 했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법은 가난해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부자로 사는 법은 가진 것이 많을수록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나누어 주기를 힘쓰고 더욱 겸손한 것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법, 부자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주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억울하고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고통스러운 때,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그 상황에서 사는 법을 배우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 처지에서 예수님 안에 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유 목사님, 교인들 부담스럽게 하지 마세요! 유기성목사님이니까 매일 일기도 쓰며 주님과 친밀하려는 거지 누구나 그럴 수는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참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과 저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요? 주님께서 제 안에 거하시니 저도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살려는 것입니다. 저만 그런 은혜받았고 목사님은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저만 주님과 친밀할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요셉은 비천에도 처하는 법도 배웠고 존귀에도 처하는 법도 배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내리막 길에서나 오르막 길에서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도 사는 법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2022년 4월 27일 국민일보 [예수동행] 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