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죽어야 하는가?
여러분은 저를 어떻게 보실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저에게 “죽으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저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어지간하면 죽으라 하시겠습니까?
도무지 건질 것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고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평가를 받아들이고 ‘제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동의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일 먼저 문제가 된 것은 내적인 죄였습니다.
음란하고 정욕적이고 욕심이 많고 교만하고 거짓되고 이중적인 저 자신을 보면서 자신에 절망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분노였습니다.
겉은 온유해 보여도 제 안에서는 끊임없이 분노가 치솟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설교를 잘해 보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면서 스트레스만 엄청 쌓여 갔습니다.
이런 모습이 성령충만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성령께서는 강하게 역사하고 싶어하시는데, 은혜의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 자신이었습니다.
성령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홍해를 가르셨고, 나사로를 살려 내신 분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목사인 제가 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지 않은 자아가 성령의 역사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을 깨닫고 기겁을 하며 놀랐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 는 것이 또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죽으려 해도 저는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 성경께서 말씀으로 ‘제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결국 저는 “나는 죽었습니다!” 하는 선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계기가 있었습니다.
근거없는 악한 소문으로 오해를 받았을 때, 싸우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고 속이 썩어 죽을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 때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였고 제 자아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이 고백, 진심에 나온 이 고백이 나오기 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그 때부터 주님께서 조금씩 저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악당은 이러봐도, 저리봐도 악당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 악당은 그렇지 않습니다. 쾌락을 주고 재미를 주고 성공을 주고 탐욕을 채워주는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지금 세상은 선과 악의 구분이 안됩니다. 아니 악이 선같아 보입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나는 죽었습니다’ 하지 않으면 살 길과 죽을 길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나 우상숭배해야지’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자신이 우상숭배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교묘하게 다가와 자기에게로 이끌어가고 있기에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된 삶, 일상의 기적을 경험하며 사는 삶을 사는 것은 의외로 너무나 간단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고 단순하기에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그렇게 애통한 것입니다.
초점은 자기를 부인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초점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말씀하셨지만 저절로 주님 안에 거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 말씀하실 이유도 없으셨을 것이고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바깥에 버려져 마르나니”라는 말씀도 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황홀한 일입니다.
결코 비참한 느낌이 아닙니다. 아니 감사하고 기쁘고 자랑스럽니다.
앞으로 도무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만 시련이 올 때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혼자라도 믿어야 하지만 우리가 서로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면, 우리를 통해 세상 가운데 주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동행일기를 함께 쓰자는 것입니다.
- 2022년 7월 20일 국민일보 [예수동행] 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