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권세가 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도 주님이 기뻐하실 말만 하여야 합니다.
말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만 아니라 믿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사람만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고 마귀가 듣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목사님 한 분이 늦게까지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딸에게 한 마디 야단치지 않고 끊임없이 “사랑해” 라고 고백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딸이 혼자 놀면서 ‘아빠가 나 사랑한댔다!’ 하더라는 말을 아내가 전해 주더랍니다. 어린아이이지만 스스로 얼마나 좌절이 컸겠습니까? 그런 자신을 아빠가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런 후 얼마 안가 오줌을 싸지 않았답니다. 늦게라도 오줌을 가렸다는 보다 더 귀한 것은 어려서부터 아빠의 조건없는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이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변화가 있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주목하지 말고 주님을 주목하면서 주시는 확신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나면서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가 “제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예수님께서 모르셨을까요?
예수님은 그가 “저를 치료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며 자신의 믿음을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시인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지실 것이다’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해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하라,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 사실을 정확히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낙심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면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최후에 승리는 나의 것입니다’
이것은 주 안에서 엄연한 사실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겐 감사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기뻐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말로 고백하는 것 보다 더 유익한 것은 글로 쓰는 것입니다.
한번 내 뱉은 말은 주어담을 수 없지만 글은 수정할 수 있기에 정확히 고백해야 할 것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동행일기를 쓰는 엄청난 유익입니다.
저는 동행일기를 쓰면서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으로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이 또한 제 확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한 고백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말에 권세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하는 훈련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