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복되다 믿어질 때
믿음이 성장했는지 언제 알 수 있습니까?
고난이 복되다 믿어질 때입니다.
“힘들다” “죽겠다” 하는 말이 툭 튀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함께 하시는 주님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누구나 아무런 어려움도, 고난도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성공인 줄 알았습니다.
예배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크고 편리한 교회 건물을 세우고, 세련되고 감동적인 설교를 하며, 음악회를 연상케 하는 찬양이 있고, 어려운 사람들을 마음껏 도울 수 있으면 목회 성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말씀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주의 종인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면 쉬운 길 보다 고난의 길이 더 귀하게 여겨집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두려워하거나 탄식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일하실 것이 기대가 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유럽교회가 몰락하는 것은 바로 고난의 복음을 거부하고 문화적인 기독교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20세기 유럽교회의 세속화를 연구한 데이비드 마틴은 교회의 세속화에 두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일차적 세속화는 교회가 윤리적 수준을 낮춤으로서 교인들이 부담 없이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인데, 이 때는 교인이 늘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차적 세속화가 이어지는데,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면 교인들이 신앙의 의미를 상실하고 급격히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재미없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 스타트는 유럽 교회가 박해받지 않는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박해할 만한 것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으면 고난당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구원은 전적으로 값없이 받은 십자가의 은혜에 의하여 주어진다는 원색적인 복음을 굳게 붙잡으면, 세상의 교만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다.
교회가 혼전 순결, 동성애 반대, 부부의 정절, 원수 사랑을 강조하고, 강력하게 전도하면, 대중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분명하게 증거하면 세상은 분노할 것이다,
폭력과 투옥과 죽음까지는 아닐지라도 조롱과 배척이 따라 올 것이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더욱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고난도 꺽을 수 없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해리 아이론사이드(Harry Ironside) 박사와 동역하는 한 여인이 집에서 비스킷을 구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돌렸습니다.
그것을 먹은 사람들마다 칭찬하는 말을 듣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박사님, 참 이상해요. 이 비스킷을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들은 하나같이 맛없는 것들뿐이예요. 밀가루도 맛없고 베이킹 파우더도 맛이 없어요.
그렇다고 쇼트닝이 맛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이런 주재료들 말고 소량으로 첨가된 것들도 하나같이 맛없는 것들뿐이예요.
그런데 이 재료들을 한데 섞어 오븐에 넣고 구우면 맛있는 비스킷이 되어 나와요"
우리의 삶이 꼭 이와 같습니다. 대부분은 아무런 맛도 없고 심지어는 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맛없는 것들을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상치 못한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고난이 복되다 믿어질 때, 우리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