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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해산하는 수고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3.09.22|조회수47 목록 댓글 0

다시 해산하는 수고

인생의 비극은 좋은 집에서 살아 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공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휴양지에 가보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지 못하고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주의적 종교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 (갈 4:19)고 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종교 생활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원했습니다.
더 이상 율법과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으로 삶으로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해산하는 수고’라 해서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빌 1:6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마음에 주님이 거하시는 것을 기뻐하며 즐거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마음에 왕을 두는 것을 싫어합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라 말만하지 왕을 모시고 산다는 의식이 없습니다.
은밀한 죄를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라 깨닫고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주님이 함께 하심을 계속 잊어버리고 삽니다.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되면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과 동행하라는 것이 싫어지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위하여 눈도 빼어 줄 수 있을 만큼 사도 바울을 사랑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갈라디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반발하고 거역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 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못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마음입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생명의 길은 너무나 힘들게 느껴지고 망하는 길이 좋아 보이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음이 닫힌 사람에게 좋은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시지요? 경험해 보셨지요?
우리에게 다시 해산하는 수고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일기를 씁니다.
그것은 마음이 너무나 쉽게 굳어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리가 부러져 기브스를 하면 다리가 굳어집니다. 고통스런 재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은 더 그렇습니다. 하루를 쓰지 않으면 그 다음날은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일기를 이틀을 쓰지 않으면 다시 일기를 쓰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매일 마음이 완고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마음에 예수님이 거하시는 것이 믿어져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이 다시 해산하는 수고의 열매입니다.
이 일은 우리 자신만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 위하여 너무나 중요합니다.
한국 교회의 영적대각성을 위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동행운동이 한국 교회를 위한 [다시 해산하는 수고]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한국 교회 영적대각성의 불씨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기 전에 120명의 제자가 열흘 동안 전심으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십니다.
그러니 막연히 어떤 특별한 집회에서 한순간, 갑자기 부흥이 일어나기만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1년이 지나서, 10년이 지나서 할 것입니까?
지금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 지금 해야 합니다.
지금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요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다시 해산하는 수고입니다. 그것이 우리 부흥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러면 예배를 드릴 때, 기도회로 모일 때, 집회 중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 감리교신학교에서의 예수동행집회 메시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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