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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에서 사는 은혜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2.15|조회수32 목록 댓글 0

땅 끝에서 사는 은혜

무기력에 빠진 목사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목회 현장이 너무나 어렵고 가족들의 현실도 암울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어 마음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께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순교자의 상황, 북한에 억류된 선교사님들, 지하 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면 힘들다 할 수 없지 않겠느냐’ 며 위로해 드렸습니다.
제 말이 그 목사님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고통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씀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 입장이라도, 정말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주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과 환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가정과 이웃, 직장, 학교가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선교사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역지가 좋고 나쁜 곳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라 하시는 곳은 어디나 사역지입니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 늘 만나는 사람이 다 선교대상자들입니다.
선교사는 이웃 한 사람과 친해져도 놀라운 선교 보고거리가 됩니다,
직장에 취직하거나 가게를 열었다면 큰 선교의 결실입니다.

선교사는 업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고 파송받은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성공이고 기적이고 감동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겔 16:6) 하였습니다.
이것이 종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고 위로입니다.

1914년 어니스트 섀클턴이 27명의 대원과 함께 최초의 남극 횡단에 도전했지만 얼음에 갇혀서 1년 3개월을 갇혀 있었습니다.
누구도 이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배를 버리고 얼음 바다를 걷고 또 걸어서, 간신히 무인도에 도착했으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사는 섬까지의 거리가 1000km였습니다.
새클턴과 두 명의 대원만 작은 구명정을 타고 바다를 건너서 스토롬니스 포경 기지에 도착하여 비로서 생존 소식을 전하고, 칠레정부로부터 빌린 엘코 호를 타고, 탐험 대원 전부를 구출했습니다.
그들은 남극횡단은 커녕 남극 땅에 발도 붙이지 못하였지만 영웅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그들의 업적이 아니라 남극에서 일년 반 동안 끝까지 참고 견뎌 모두가 살아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새클턴 만 아닙니다.
동굴에 실종되었던 13명의 태국의 소년들, 살아만 있어도 영웅입니다.
지진으로 매물된 건물 더미에서, 무너진 탄광에서 살아만 있어도 영웅입니다.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답답함과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자신이 북한이나 사우디아라비아나 예멘에 있다고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북한,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같은 나라의 선교사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그 곳에서 죽지 않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선교사입니다.

주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하셨는데, 땅 끝이 어디일까요?
어느 목사님이 ‘항상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고 사는 곳이 땅 끝이라’ 하였습니다.
어려운 형편의 교회라고 하지만 선교사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좋은 여건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의 성패는 업적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 에 죄우됩니다.
어려운 형편이라도 매일 주님을 바라보는 기쁨으로 살고 있다면 정말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운 목회 현장이나, 가정, 일터, 영적 싸움의 한복판에서 포기하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며 하루 하루 살아있는 것만으로 성공이고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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