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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송이보약큐티, 22년9월21일(수), 욘2장~4장. 요나의 잘못된 분노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9.21|조회수31 목록 댓글 0

<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22년 9월 21일(수) #264>

*오늘의 읽을 말씀: 요나 2장~4장
요나의 잘못된 분노

*묵상자료

1. 하나님을 믿는 자의 잘못된 분노


신약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 가운데 아침에 온 사람, 정오에 온 사람, 오후에 온 사람이 똑같이 하루 품삯을 받게 되자 아침에 온 사람들이 분노하더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고 싶어 했던 이스라엘을 깨우쳐주시기 위해 들려주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메시지는 이미 요나서와 같은 책을 통해 오래 전부터 선포되었던 주제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는 질문으로 끝나고,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질문으로 끝나는데 가만히 보면 두 질문이 같은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기득권에 취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누리던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이기심에 생각의 길목이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요나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수없이 용서하시던 그 자비로운 사랑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동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 대한 요나의 분노는 단순한 질투의 감정으로 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기득권을 위협받는 자가 느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증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그것을 빼앗기게 되면 극도의 증오심을 표출한다. 기득권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사람이 그것을 지키려고 싸우기 시작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생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파렴치한이 되기 쉽다. 사람의 인격과 존엄 같은 것들을 철저히 무시하게 되며, 자기 인격도 포기하고 남의 인격도 함부로 짓밟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요나는 좌우 구분이 안 되는 어린 아기만 12만 명이 넘는 큰 도시가 통째로 멸망하기를 간절하게 바랬고,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죽고 싶다”고 외칠 정도로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다. 아마 요나에게 ‘기자의 펜’을 허락했다면 니느웨를 무너뜨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가짜 뉴스들을 만들어냈을 것 같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사고가 요나처럼 경직되면 정말 무서운 고집불통의 크리스챤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에 있는 가축들까지도 아끼시는 분이셨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고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남김없이 쓸어버리라’고 하셨다던 그 하나님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낯선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실은 세상 전체를 아끼시는 이 자비로운 모습이 하나님의 참모습이시다.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신 어머니와 같은 근본이시기 때문이다.

자비심을 잃은 신앙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득권을 위해 싸우는 광신도로 돌변한다. 뭔가 중요한 것을 빼앗길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켜서 앞뒤 구분 없이 할퀴고 물어뜯게 만든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요나의 이러한 반응은 요나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어리둥절한 대목이다. 생각해보면 요나 입장에서는 최악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자신이 사력을 다해 저지하려 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만의 상자 안에 담아 두려 했다. 어쩌면 하나님보다 자신의 신념을 더 믿었을지 모른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의 수많은 목사, 선교사, 장로, 권사님들 중 요나 같은 분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4:10-11)

요나서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이다. 대답 없는 질문으로 불쑥 끝나버린다. 막은 내린 셈이고, 갑작스러운 엔딩은 이 이야기의 적용을 독자에게로 넘긴다.

성경에서 대부분의 선지서들은 선지자의 메시지에 그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요나서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아니라 선지자에게 초점을 맞춘 유일한 선지서이다. 그러므로 요나의 모습, 요나의 삶이 곧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요나와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https://youtu.be/VJL-K5Twy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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