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23년 10월21일(토)>
*오늘의 읽을 말씀: 누가복음 17장~19장
삭개오의 회심
*묵상자료
1. 삭개오(눅19장)
예수님께서 오랜 여행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도착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 눅19장에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 가까운 오른쪽에는 “여리고”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삭개오가 살고 있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그를 가리켜 “세리장”이라고 설명한다. 이 당시 이스라엘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의 거의 대부분을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거대한 제국을 잘 유지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돈, 즉 ‘세금’이었다. 로마 제국이 생각해 낸 많은 세금의 징수 방법은 각 영토별로 세금을 거두는 권한을 장기 임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 담당자가 정해진 세금만 로마제국에 제때 바친다면 그가 추가로 돈을 걷는 것에 대해 일체 참견하지 않았다. 그리고 책임자는 스스로 모든 세금을 직접 다 거두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 비슷한 방식으로 구역을 나누어서 세금을 걷는 사람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고용된 세리들 역시 자신 밑에 다른 일꾼들을 두어 그들에게 세금을 거두게 시켰다. 문제는 그 세리들이 꼭 필요한 양의 세금만 걷는 게 아니라 정해진 액수보다 지나치게 훨씬 많은 양의 돈을 그 사회 절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악랄하게 빼앗았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세리라는 존재는 그들이 힘겹게 일해서 번 소중한 돈을 합법적인 수단으로 빼앗는 흉악한 강도들이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세금을 걷어서 최종적으로 바치는 곳이 바로 로마제국이라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 야만스런 로마가 자신들을 침략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였다. 이것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로서는 무척 서럽고 비참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원수같은 로마제국이 든든히 잘 유지되도록 세금을 걷으며 동족을 착취하는 세리들이 그들 눈에 과연 어떻게 보였겠는가? 단순히 강도일 뿐만 아니라 신앙까지도 저버리고 적국에 아부하는 끔찍한 매국노 그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삭개오를 그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았을까? 비록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그를 향해 “더러운 욕심으로 가득 찬 돼지”, “애국심도 없는 천박한 로마 앞잡이”, “돈에 눈이 멀어 양심도 저버린 매국노” 라고 속으로 외치며 경멸어린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여리고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그들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문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수많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들도 살리셨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신비로운 일도 행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호기심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보려고 나갔으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바람에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궁여지책으로 길가에 서 있던 나무 위로 올라가 기어코 예수님을 한 번 보고자 했다.
눅19:3-5에는 각 절마다 반복되는 동사 하나가 있다. 바로 “보다”라는 동사이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우리말 번역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3절과 4절에 두 차례 등장하는 삭개오의 “보다”와 5절에 한 번 언급되는 예수님의 “보다”가 헬라어 원문에는 각각 다른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3절과 4절에서 삭개오를 묘사하는 “보고자 하되”와 “보기 위하여”로 옮긴 헬라어의 뿌리는 둘 다 <호라오>이다. 이것은 신약 원문에 매우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반면 5절에 나무위로 올라탄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쳐다 보셨다”고 기록한 단어는 보통의 <호라오>가 아닌 <아나블레파스>이다. 이 낱말은 “위로 보다”로 직역할 수 있는데, 신약 성경에 단 7차례 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마 14:19; 막 6:41, 7:34, 8:24, 눅 9:16, 19:5, 21:1). 그리고 그 대부분은 허공을 향한 멍한 시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위를 바라보며 갈망하는 눈길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흔히 사용되는 <호라오>와는 달리 ‘마음의 눈으로 보다’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드린 모습을 기록하면서 이 <아나블레파스>를 사용하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신’ 주님의 눈길은 무의미한 습관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간절한 주시였다. 돌무화과나무 위를 향한 주님의 눈길을 묘사하면서 삭개오와 똑같이, 평범하게 그냥 ‘보셨다’라고 언급해도 이야기 흐름에 전혀 무리가 없다. 그런데 굳이 마음의 눈으로 ‘위로 올려다보셨다’고 정확히 묘사한 이유가 무엇일까? 누가복음은 이와 같은 정교한 단어 선택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삭개오의 눈길과는 달리,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막연한 시선을 던지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나무 위”에 초라한 모습으로 올라가 있는 삭개오, 그 한 사람을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해 정확히 응시하셨음을 독자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19:5)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얼른 내려오라고 하시며 오늘 너의 집에서 머무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음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그 곳에 머물며 쉰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한 ‘유목민 문화’에 있어 우리가 생각 하는 그 이상으로 각별하게 마음을 같이 하는 친한 친구가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에게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같은 민족의 돈을 빼앗는 죄책감을 보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리 악착같이 재산을 긁어모아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마음 속 깊은 공허함을 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체면을 무릅쓰고 나무 위에 오르면서까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영혼의 갈급함을 보셨던 것이다. 그렇게 삭개오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사랑어린 눈길을 경험하였다. 그의 내면 깊은 곳을 향한 주님의 예리하고도 따뜻한 시선과 눈을 맞춘 삭개오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갔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여 잔치를 베푼 후 결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가진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남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막연하고 모호한 회개를 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약자들을 향해 저질러 온 정확하고 구체적인 죄를 명확히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머물지 않고 분명한 실천을 공개적으로 다짐하였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새롭게 변화된 삭개오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보내시는 사랑의 눈길이 닿는 곳에 얼마나 위대한 일들이 시작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싸늘한 시선으로 삭개오를 냉대했으나 예수님은 따뜻하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셨다. 그 삭개오가 만났던 주님이 바로 나와 당신의 동일한 구주이시다. 아멘.
https://youtu.be/vo-anSVov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