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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송이보약큐티 / 23년 10월22일 : 누가복음 20장~24장.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첫 마디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3.10.22|조회수39 목록 댓글 0

<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23년 10월22일(주일)>

*오늘의 읽을 말씀: 누가복음 20장~24장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첫 마디

*묵상자료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인간들은 세상을 지으신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를 알지 못하였다. 영광의 주님이 사람 가운데 거하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배척하였다. 주님이 탄생하셨을 때 여관에는 주님을 모실 방이 없었다. 그것은 주님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서 받으실 대접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시하여 주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원수들의 손에 넘기워 주셨다. 몇 차례 거짓된 심문이 있었고, 심문자들은 주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여 낼 수가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심문자 빌라도는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끈질기게 고함치며 위협하는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에 극도의 고통과 수치스런 죽음이 결정되었다. 십자가가 준비되고 그 위에 구주께서 못 박히셨다. 이윽고 주님의 십자가는 공중으로 곧게 세워졌다. 주님은 말없이 거기에 매달려 계셨다. 그런데 순간 주님의 창백해진 입술이 움직이려는 듯이 보인다. 그가 동정을 구하시려는 것일까? 아니었다. 그러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었다. 주님은 지금 기도하시려는 것이다. 바로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려 하시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이것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주님의 가상칠언 중 처음의 말씀이다. 필자는 존 라일 목사님이나 아더 핑크 같은 탁월한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깊은 영감과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 분들의 가르침을 다시금 음미하며 함께 나누고 있다. 주님의 공생애는 기도로 막이 올랐다(눅 3:21).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공생애가 다시금 기도로 막이 내리는 것을 본다. 누가는 특히 주님의 기도의 모습을 많이 할애하여 그의 복음서에 담아 놓았다. 확실히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남기셨다! 이제 주님의 두 손은 더 이상 병자들을 위하여 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의 두 발은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도록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주님의 두 발이 저 잔인한 나무에 단단히 못 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이 사도들을 가르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사도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주님은 어떻게 기도하실 수가 있었단 말인가? 만일 당신이 이 귀한 기도의 사역을 비웃도록 시험을 당하면 당신의 구주를 기억하라. 그 분은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최후 순간까지도 기도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의 효력을 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위하여 하신 이 십자가 위에서의 중보기도는 분명하고 확실한 응답을 받았다. 그 응답은 오순절 날 3천명의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온 사실에서 확실하게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베드로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고 말한 사도행전 3:17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결론을 내린 것이다. 베드로가 사용한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라는 말이 우리 주님의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는 말씀과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베드로가 행한 한 차례의 설교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온 사건에 대한 하나님편의 설명이 있다. 그것은 베드로의 뛰어난 웅변술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구주의 기도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승리를 본다. 본문 서두의 “이에”라는 말에 자세히 주의하여 보라. 바로 앞선 구절을 보면,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로 되어 있다. “이에”, 그 때는 인간의 사악함이 그 절정에 이르렀을 순간이었다. 주님은 이 순간 저들을 향하여 무서운 저주를 퍼부으실 만도 하였다. 주님은 이 순간 의로우신 진노의 번개를 명하여 저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실 만도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아니하셨다. 주님은 이 순간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고 계셨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계셨으며 멸시와 배척과 미움을 받으셨으나 이 모든 일
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셨다. 위대한 힘의 용사 삼손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그 몸의 마지막 힘을 그의 원수들에게 복수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완전하신 구주께서는 그 사랑의 위대한 힘을 원수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보여주셨다. 그야말로 비할 데 없는 은혜였다! 아멘.


https://youtu.be/05vtWNfDV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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