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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송이보약큐티 / 23년 11월3일 : 사도행전 13장~15장. 안디옥 교회의 모범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3.11.03|조회수33 목록 댓글 0

<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23년 11월3일(금)>

*오늘의 읽을 말씀: 사도행전 13장~15장
안디옥 교회의 모범

*묵상자료

1. 최초로 선교사가 파송되다(행13:1~3)


행13장에는 세계 최초로 선교사를 이방인들에게 파송한 안디옥 교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13:1)

다섯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다. 다섯 명의 이름을 한 사람씩 거론한걸 보면 안디옥 교회에는 말씀을 잘 가르치는 선지자와 교사가 다섯 명씩이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안디옥 교회는 말씀이 충만한 교회였다. 보내는 교회의 첫 번째 모습은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라는 것이다. 다섯 명의 이름 안에는 다양한 정보가 들어 있다. 유대인, 흑인, 구레네 사람 그리고 왕족… 어떻게 이들은 이처럼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었지만 교회를 하나로 이끌고 나갔을까? 어느 신학자는 말하기를 사도행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안 나온다고 하는데 이유는 사랑은 그들의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섯 지도자가 서로 사랑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그들이 서로 겸손하게 협력하며 사랑으로 목회를 했음을 쉽게 확신할 수 있다. 안디옥 교회는 말씀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던 것이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다섯 명의 배경은 다양했지만 공통적인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모두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이민자들 그룹이었다. 안디옥 교회가 왜 이처럼 세계 역사를 바꾸는 교회가 되었는지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떠난 자들의 교회였고 떠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들) 교회였다. 이처럼 조화로운 안디옥 교회에 놀라운 일이 생긴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그들은 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금식하고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는 인류 최초의 선교사 파송식이었다. 안디옥 교회는 말씀의 교회, 사랑의 교회, 기도의 교회였는데 이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최초로 세계 선교사들을 보내게 하신 것이다. 그들은 기둥 같은 교회의 지도자 둘을 선교사로 과감하게 보냈고 그 결과는 엄청난 이방 선교의 열매를 거두었다. 좋은 교회 좋은 선교사들이 뭉쳐서 좋은 복음의 열매를 거두었던 것이다.

나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을 때 광주의 양림동 호남신학교 동산에 묻혀 있는 서서평 선교사의 무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너무 존경스러워 무덤 앞에서 그녀의 비석을 붙들고 울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의 원인은 놀랍게도 만성 영양실조와 풍토병이었다. 선교사 생활비로 받았던 월급은 자신의 몸 하나 지켜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소식은 선교사들뿐 아니라 당시의 광주 지역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녀가 남긴 재산이라고는 자신의 몸을 가릴 담요 반쪽, 노동자의 일주일 품삯에 지나지 않는 7전과 강냉이 가루 두 홉이 전부였다. 그녀는 한센인들로부터 아들 딸 13명을 입양해 키워냈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받아들여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성경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시작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어머니”라 불렀다고 한다.
그녀가 죽자 당시의 언론들은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하여 `작은 예수`라며 그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동아일보》는 1934년 6월 29일 자 사설로 ‘위대한 인류애, 서서평씨 영전에’라는 글을 올렸다. 보리밥 된장국에 고무신을 끌고 다녔던 서서평을 소개하며 큰 존경과 애통을 표하는 글을 게재했다.

미국에서 처녀의 신분으로 조선땅에 도착한 그녀는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발음도 좋고 말도 유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한자도 배워 한자와 한글이 섞인 구약성경을 읽었다. 그녀는 뼛속까지 조선인이 되고자 애썼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 남자용 검은 고무신을 신었다고 했다. 된장국은 그 독특한 냄새 때문에 서양 사람들이 가장 혐오했지만, 그녀는 된장국을 먹으면서 조선에 동화되기를 자처했다. 그녀는 늘 고아들을 등에 업고 다녔다. 당시에는 한국의 고아, 병든 자를 양육하기 위해 미국에서 들어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 처녀 선교사들이 광주 양림동 선교사촌에 살고 있었는데 서서평을 비롯해 수피아 여학교 교장이었던 플로렌스(Florence Root), 도슨(Dodson), 매퀸(Mcqueen Anna), 프리처드(Pritchard Margart) 등이 그런 분들이다. 한국 교회는 이제 그 사랑의 빚을 세계선교로 되갚아야 한다.

나도 선교사이지만 그런 위대한 선배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감히 선교사라고 불려질 자격이 없는 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https://youtu.be/UVChAmOzn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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