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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송이보약큐티 / 24년 5월18일 : 욥기 31장~35장.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새로운 발상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5.18|조회수26 목록 댓글 0

<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24년 5월18일(토)>

*오늘의 읽을 말씀: 욥기 31장~35장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새로운 발상

*묵상자료

1. 욥의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새로운 발상(욥33장)


엘리후가 욥을 비판한 핵심은 욥의 결백성에 대한 주장이다. 엘리후는 욥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했던 말들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크신 분인데 어떻게 감히 그 위대하신 분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있느냐고 따진다. 그 후 엘리후의 발언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고통의 이유만 따지지 말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과거로부터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고통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는 미래로 선회하라는 충고였다. 이 생각은 그동안 욥의 어떤 친구들의 어떤 발언보다 훨씬 유익하다. 이와 같은 엘리후의 입장은 친구들이 물고 늘어졌던 인과응보론과는 매우 색다른 엘리후만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실 수 있는데 고통도 그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사람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 걸어오시는 두 가지 사례를 든다.

1) 먼저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이 엘리후의 말처럼 꿈을 통해서도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 성도들이 지나치게 꿈이나 직통계시를 의존하면 자칫 이단에 빠지기도 쉬고 마귀의 꾐에 넘어가기도 쉽다. 신약시대에는 확실한 66권의 성경이 우리 손에 주어져 있다. 우리는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건강한 신앙생활의 비결이다. 신비주의나 신사도주의에 빠지는 위험성을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2) 두 번째로 하나님은 질병과 질병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욥33:19~25).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병자들이 질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영혼과 육신이 구원받았던 것처럼 병과 치유가 하나님의 계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병든 자를 중보자 같은 천사(욥33:23)를 보내서 고쳐 주실 수도 있고 병든 자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고쳐 주실 수도 있다. 신약의 우리들에게 중보자 같은 천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엘리후의 논점을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이나 고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질병과 고통을 통해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도록 이끄시는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통에 대한 교육 훈련용 해석, 혹은 섭리 목적론적 해석이 물론 그전에 친구들의 발언 속에 간간이 내포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엘리후의 발언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공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욥이 현재 당하는 고통은 결코 불행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더욱 더 환한 생명의 빛(욥33:30)을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이 하나님의 계시를 수반할 수 있다는 엘리후의 생각은 욥의 친구들과 달리 고통에 대한 미래지향적이고 더욱 더 긍정적인 해석의 문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엘리후는 등장인물들 가운데 최연소자이지만 그동안 크게 의식하지 못했던 차원들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로 고난에 대한 연단론적 혹은 목적론적 해석이다. 하나님은 좋은 일만 통하여 역사하지 않으시고 나쁜 일을 통해서도 교통한다는 말씀이다. 사실 고난을 받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는데 의외로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것을 우리는 '창조적 고통' 혹은 '건설적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른바 '고난 받는 종'(사 52~55장)의 개념을 통하여 고난이 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연단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적 방편으로 해석했다.

예수님도 나면서 소경 된 사람이 자기 죄나 조상의 죄 때문이 아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요9:1~12) 긍정적인 해석을 내리셨다. 요셉시대에 전 세계적인 기근이 있었다. 애굽 땅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임했던 심한 기근이었다. 하나님은 그 기근을 사용하셔서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가서 살게 하셨고 이스라엘 나라의 토대를 만드셨으며 요셉의 꿈이 이루어 지도록 기근을 통해 역사하셨고 요셉의 형제들은 그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우리가 원치 않는 환경과 여건에 처하게 하시면서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서 숨기거나 감추고 있는 은밀한 죄가 있다면 전부 드러내서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깨끗하게 살게하기 위해서 혹은 더 큰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원치 않는 재난과 고통과 질병을 주실 수도 있다. 아멘.


https://youtu.be/APg4ou0Wg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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