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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송이보약큐티 / 24년 6월14일 : 시편 101편~103편.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6.14|조회수27 목록 댓글 0

<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24년 6월14일(금)>

*오늘의 읽을 말씀: 시편 101편~103편
나를 중년에 데려가지 마옵소서

*묵상자료

1.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시102편)


시편 102편은 고난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라고 표제어에 적혀 있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고난의 파도가 밀려올 때가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시기에 기도와 말씀이 우리의 피난처가 된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힘들 때마다 시편 102편을 나지막이 읊조리며 하나님께 기도하자. 2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102:2)

그는 계속해서 자기의 괴로움을 토로하기를 자신은 너무 슬퍼서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고 마음이 풀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으며 탄식으로 신음하고 살이 뼈에 붙어 해골처럼 되었다고 하소연한다. 그리고 너무 힘든 자신의 모습이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다고도 하며 밤에 잠을 못 자고 뒤척이며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은 자신의 고독을 하나님 앞에 주절주절 아뢰고 있다. 욥이 당한 고난 같은 아픔을 이 시인이 겪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9절에서는 물을 한 모금 마시려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아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를 마시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기도 한다.

시편 102편의 기자는 지금 지붕 위의 외로운 새처럼 외딴 섬의 고독 속에 갇혀 있다. 주변의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다 원수가 되어 시인을 해하려고 미칠 듯이 날뛰고 있다(8절)고 말한다. 고통이 너무 심해 시편 기자는 마침내 병이 들었다. 23절에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생명이 곧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희망인 여호와를 붙들고 눈물로 애원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시102:24)

그는 아직 팔팔한 중년의 나이였다. 세상을 등지기에는 너무나 젊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나 억울하고 서글퍼서 그는 하나님께 `나를 중년에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이 시편기자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인 정호승은 그의 시 `수선화`에서 외로운 자들을 향해 이렇게 충고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 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예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이 시인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참 좋은 위로의 시를 쓴 것 같다. 그는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말고(부질없는 인간들의 정에 메달리지 말고) 눈이 오면 눈 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 가야 한다고 한다. 이 시의 제목은 `수선화`인데 그리스 신화에 이 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르시스라는 미소년이 물속을 들여다보다가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 곳을 떠나지 못하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어서 수선화로 피어났다는 이야기다. 이런 나르시시즘(narcissism)에서 모티브를 얻어 응답 없는 사랑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인간존재의 숙명으로까지 확대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정호승의 `수선화`다. 우리가 자기애(自己愛)에 빠지는 순간 절망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시편 102편을 쓴 기자는 다행히도 나르시시즘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에게로 그의 시선을 향한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6~27) 아멘.

결국 광야의 올빼미처럼 슬퍼하던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하심으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고백은 희망으로 끝을 맺는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102:마지막절)

비록 자신의 세대에는 힘듦과 아픔이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후대가 견고하게 설 것을 감사하면서 끝을 맺는다. 기독교는 이렇게 항상 해피앤딩이다. 처음에는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 하다. 지붕 위의 참새 같은 그대여, 외로운 수선화 같은 그대여, 섬처럼 고립되지 말고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힘을 얻으라.

https://youtu.be/gUmxNYtoh1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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