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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선후협 선교포럼…이상규 교수 발제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5.05|조회수36 목록 댓글 0

제14회 선후협 선교포럼…이상규 교수 발제

 

‘한국선교에 큰 영향 미친 린튼 가’

한국선교의 양대 산맥은 언더우드(Underwood) 가와 린튼(Linton) 가라고 할 수 있다.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진 언더우드 가는 4대에 걸쳐 섬겼으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린튼 가는 5대가 한국을 섬겨오고 있다.

이번 제14회 고신총회세계선교후원교회협의회(대표회장 노상규 목사) 선교포럼에서는 ‘선교로 5대를 이어오며 한국을 사랑하는 Linton家 사람들’을 조명하는 시간을 통해 한국선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깊이 있게 헤아리는 시간을 가졌다. 이 가운데 이상규 교수(백석대)가 발제한 ‘린튼 가 선교사들이 한국선교에 미친 영향’의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Linton家 선교사들이 한국선교에 미친 영향

이상규 석좌교수(백석대)

 

남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배경

1876년 개항과 1882년 5월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이후 외국인들의 내한이 가능해지자 중국과 일본에 있던 개신교 선교사들은 본국교회에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통보했고 미국 북장로교회는 1884년 9월 알렌과 1885년 4월 언더우드를 한국으로 파송했다.

미국 감리교회는 일본에 주재하던 매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를 1884년 6월 24일부터 2주간 동안 한국으로 보내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했다. 그 결과로 감리교 선교부는 의료선교사 파송을 준비했다. 1884년 10월 의사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 1856-1922)과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 Scranton, 1832-1909)을 첫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고, 곧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도 한국선교사 후보로 받아들였다.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함께 내한하게 된다. 5월 1일에는 북감리회 스크랜톤이,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의 헤론 의사가 입국하면서, 장감선교사들이 내한하는데, 초기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교회는 미국의 북장로교(1884), 북감리회(1885), 호주장로교(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1892), 미국남감리교(1893), 캐나다 장로교회(1898) 등이었다.

 

그 외에도 구세군, 성결교, 성공회, 정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성회, 재림교회, 성서침례교회, 형제회, 메모나이트교회 등이 후에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해방 전까지 내한한 선교사는 약 2천 명으로 추산되고, 1884년 알렌 이후 185년까지 내한한 선교사 총수는 3,180명으로 파악된다. 이중 미국북장로교회는 454명, 미국남장로교회는 448명을 파송했다. 호주장로교회(1977년 이후는 호주연합교회)는 126명, 캐나다장로교회(1925년 이후에는 캐나다연합교회)는 153명을 파송했다.

 

미국 북장로교회는 알렌(1884)과 언더우드, 헤론(1885) 등을 파송하면서 한국선교를 시작했으나 남장로교회는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1891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한 가지 목적은 한국선교에 대한 보고였고, 다른 한 가지는 선교 동원, 곧 한국으로 올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해 10월 언더우드는 테네시 주 내쉬빌에서 열리는 전국신학생 선교연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에 참석해 한국선교를 호소했고 이 영향으로 주어 전킨(William Junckin, 1865-1908) 등 선교지원자가 생겨났고, 남장로교회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됐다.

미국에서 장로교회는 1706년 일곱 목사를 중심으로 필라델피아노회를 조직했고, 1716년에는 4개의 노회가 모여 필라델피아대회를 형성했다. 이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채용한 것은 1729년이었다. 1741년에는 부흥에 대한 문제로 구파, 신파로 나뉘었고 1758년에는 미국장로교라는 이름으로 통합됐으나, 회중교회와의 연합 건으로 1837년 다시 분열했다. 그 후 노예제도 존폐문제로 다시 분열되어 미국남장로교(1866)와 북장로교(1870)로 분열됐는데 110여 년 후인 1983년 양 교회는 미국장로교회(PCUSA)로 통합됐다.

 

그런데, 미국남장로교회는 남북전쟁 직후인 1867년 중국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콜롬비아, 브라질(1869), 멕시코(1874), 일본(1885), 콩고(1891)에 이어 1892년 한국에 첫 일곱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이들이 레이놀즈 목사(이눌서, Rev William Reynolds) 부부와 전킨 목사(전위렴, Rev William Junkin) 부부, 맥코믹신학교 출신인 루이스 테이트 목사(최이덕, Rev Lewis Boyd Tate)와 그의 여동생 메티 테이트(최마태, Miss Mattie Tate), 그리고 리니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등이었다. 이들 남장로교의 첫 7인의 선교사를 ‘7인의 개척자’ 혹은 ‘7인의 선발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그해 10월 18일과 11월 3일 한국에 도착했고, 선교지역 분담정책에 따라 전라도 지방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호남지방 선교의 시작이 된다.

특히 테이트 목사 남매는 1894년 3월 19일 서울에서 출발해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전주에 도착했는데, 이것이 전주지부의 시작이 되었다. 이들에 의해 전주에 전주서문교회가 설립됐는데, 이 교회가 호남지방의 첫 교회였다. 이들 7인에 이어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목사 부부는 의사이자 목사인 오웬(A. D. Owen)과 함께 남장로교회의 제2진 선교사로 1895년 4월 9일 내한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유진 벨은 이때부터 1925년까지 30년간 한국에서 일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선교헌신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에서의 사역은 후대로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선교했던 선교사 가문 중 으뜸가는 가문으로 특히 두 명문가를 말하는데, 언더우드가(Understand family)와 유진 벨(Eugene Bell) 가문이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가 파송했던 대표적인 선교사였고, 유진 벨은 남장로교회가 파송한 대표적인 선교사였다.

 

한국에 끼친 영향

전라남도 선교의 개척자이자 광주지부를 개척했던 유진 벨(배유지)과 로티 벨 부부로 시작해 2대, 살롯 벨과 윌리엄 린튼(인돈), 3대 휴 린튼(인휴)과 로이스 린튼(인애자), 4대 데이비드(인다윗), 스티브(인세반)와 존(인요한)으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린튼 가의 130년(1895-2024)간의 한국 선교사역에 헌신해왔다.

한국과 한국사회, 한국교회를 위해 자기희생적 삶을 감내하면서 하나님과 한국과 교회를 위해 헌신한 결과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워졌다고 할 수 있고, 이들의 사역이 한국교회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1대. 배유지, Eugene Bell (1868-1925): 수피아여학교 설립자

배로티, Charlotte “Lottie” (Witherspoon) Bell (그녀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후 남장로교 총회장 역임)

 

2대. 인사례, Charlotte (Bell) Linton: 목포정명여학교 교장

인돈, William A. Linton (1912-1960): 대전대학 설립자 및 초대학장

 

3대. 인휴, Hugh M. Linton (1953-1974): PCA 선교사(1974-1984), 등대선교회 설립

인애자, Lois Elizabeth “Betty” (Flowers) Linton(1927-2023), 전 기독결핵재활원 원장

인도아, Thomas Dwight Linton (1953-1978): 등대선교회 공동설립자 호남신대 학장

 

4대. 인다윗, David Y. Linton 인다윗(1949- ): 리폼드신학교 졸, PCA 선교사(1977-1980)

인세반, Stephen W. Linton(1950- ): 고려신학대학원 수학, 유진벨재단 설립 및 이사장

인요한, John Alderman Linton(1959- ):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4대에 걸친 이들의 사역은 한국교회나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첫째, 호남지방 기독교 형성에 이바지했다. 1대 유진 벨로 시작된 초기 선교운동은 호남지방 기독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선교지부 개척과 교회 설립과 양육에 이바지했다. 둘째, 호남지방 기독교학교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수피아여학교, 목포 정명학교 등 여러 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 교육을 실시해 근대 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셋째, 의료활동, 특히 결핵 치료와 퇴치 운동, 요양원의 설립을 통해 보건 및 의료발전에 이바지했다. 넷째,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특히 2대 선교사 인돈은 1919년 3월 5일 군산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군산의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자 일제는 폭력으로 진압했는데, 인돈은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고, 이를 언론에 제공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도 활동했다.

이 일로 2010년, 3.1운동 91주년 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다섯째, 미국교회 특히 미국남장로교회에서의 선교운동과 선교 동원에도 영향을 끼쳤다. 린튼 가의 선교 활동은 해외 선교, 선교운동에 대한 도전과 자극을 주었고 선교 동원에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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